백제로 떠났던 5만여명의 왜국의 군사들 중 상당수는 집에 돌아오지 못했다. 한반도 전쟁터로 떠나간 후 해가 몇 번이나 바뀌어도 돌아오지 못하는 아들을 잃은 어머니들이 아들이 탔던 배가 수평선 너머 사라진 선창가에 서서 자식의 이름을 목이 메도록 부르며 울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당나라와 신라군이 도망해온 왜군의 배를 뒤쫓아 아스카(飛鳥)를 공격할 것이라는 첩보가 계속하여 뒤를 이었다. 아스카는 혼돈에 빠졌다. 중대형 황태자는 아스카를 버리고 내륙 깊숙한 오미(近江)로 수도를 옮겨야 했다. 어쩔 수 없는 국방상의 이유였다고는 하나 오랫동안 아스카를 가꾸고 정을 쏟았던 사람들이 내륙의 낯선 곳으로 내몰리는 상황을 좋아할 리 없었다. 중대형 황태자를 중심으로 뭉쳐 있던 유순했던 왜인(倭=유순하다 왜)들의 마음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거기에 따라 스물스물 불길한 기운이 퍼지기 시작했고 사람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왜국의 실권자 중대형 황태자가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 그는 사람들의 마음을 한데 묶으려 했다. 바로 이때 화합을 강조하는 향가가 만들어진다. 나와야 할 때 나와야 할 내용이 나온다. 만엽집 19번가의 작자는 정호왕(井戶王)이다. 그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없다. 아마도 여인이었을 것이다. 등잔불 아래서 바느질하며 만들었을 것같이 섬세한 작품이라 여자라 추측했다. 19번가를 감상해 보며 그 당시 중대형 황태자의 마음을 헤아려 보자. 綜麻形 乃/林始 乃 狹野/榛能衣 尒 着 成/目 尒都 久和我勢 “한 올의 실로부터 베옷이 만들어진다네. / 숲은 시작된다네, 조그만 들에서부터. / 덤불이 옷처럼 들에 입혀지면 숲이 된다네. / 이곳에서 윗분들이 화합하고 또 화합해 나간다면 큰 세력이 이루어질 것이라네” 이 작품은 오미(近江) 새 도읍에서 ‘윗분들(目)이 고집스럽게 화합을 위해 노력해달라’고 빌고 있다. 무수한 분열적 일들이 있었을 것이다. 화합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은 오히려 화합에 큰 문제가 있다는 것을 웅변하고 있다. 강고했던 중대형의 권력에 금이 쩍쩍 가고 있었다. 한반도 백마강에서의 패전과 오미(近江)로의 천도가 균열의 시작점이었다. 일본인들은 이 작품을 다음처럼 푼다. 도저히 국가적 균열 앞에 만든 작품이라 할 수 없다. “잉아대 모양(三輪山) 수풀 앞에 있는 개암나무가 옷에 물이 잘 들듯이 내 눈에 들은 그대” 중대형 황태자는 갈라지는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기민하게 움직였다. 그는 향가의 힘을 빌어 민심을 한 곳에 모으고자 했으며, 대형 조치들을 잇달아 내놓았다. 그는 최우선적으로 줄곧 늦추어 왔던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즉위한 칭호가 천지(天智)천황이다. 즉위는 어머니 제명천황 사후 7년만인 668년. 어머니 사후 실질적으로 왜국을 통치했으나, 전쟁 수행과 패전 뒷처리로 즉위식을 거행할 상황이 아니었을 것이다. 나라의 분위기를 일신하고, 권력의 중심을 명확히 한 것이다. 즉위 한 달 후 그는 동생 대해인(大海人) 황자를 후계자로 발표했다. 자신 다음으로 동생이 천황에 오를 것임을 공식화한 것이다. 천지천황은 알고 있었다. 무엇인가 불길한 기운의 뒤에 증거는 없으나 중심에 자신의 동생인 대해인 황자가 있다는 사실을. 천지천황은 그를 관리하기 위해 임시방편으로 후계를 정했던 것이다. 그리고 몇 달 후인 5월 5일 단오날, 천지천황은 고위 신하들을 불러 오미(近江) 인근의 포생야(蒲生野)라는 들판에서 사냥대회를 개최하였다. 국가 지도부의 화합을 위한 대규모 행사였다. 균열을 봉합하고자 하는 안간힘이 느껴진다. 천지천황은 폭풍이 부는 호숫가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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