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금강산 표암봉 일원’이 17일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으로 최종 지정됐다. ‘경주 금강산 표암봉 일원’은 역사적 공간성, 신라 불교 성지로의 상징성, 불교 공인 이후 변화된 신라 (매장)의례 공간성 등을 지닌 곳이다. 이번에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으로 지정된 주요 배경과 현존하는 유적 등에 대해 살펴봤다.-신라 건국 도모한 역사적 장소 문화재청에 따르면 이곳 일원의 ‘역사적 공간성’은 바로 신라의 국가적인 중대사를 논의하던 사령지(四靈地)이자 왕경오악(王京五岳) 중 북악이라는 점에 있다. 화백회의가 열렸던 곳으로, 신라사 전 시기에 걸쳐 신성한 공간으로 인식돼왔다는 것. 오악은 왕경의 중앙과 사방을 둘러싼 신성한 산으로 동악(토함산), 서악(선도산), 남악(남산), 중악(낭산), 북악(금강산)이 있다. 사령지는 신라의 중대한 일들이 있을 때 모여 회의하던 장소로 동(청송산), 남(우지산), 서(피전), 북(금강산)이 있다. 북악인 금강산은 신라초기 왕경 북쪽을 구획하는 중요한 공간으로, 특히 표암봉은 진한 6촌 가운데 알천 양산촌과 명활산 고야촌 시조 탄강지로 인식돼왔다. 또 통일 이전 왕경 주변의 사령지 중 하나로 6부의 촌장들이 모여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하고, 신라 건국을 도모한 장소로 신성시돼왔다. 특히 국가 중대사를 결정하는 대신들의 화백회의가 열린 곳이기도 하다. 이처럼 신라의 건국과 고대국가로 이어지는 과정의 역사를 담고 있는 신성한 곳으로 역사적 공간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이번 심의 과정에서 내놓은 문화재위원들의 의견이다. 또 역사적 상징성은 ‘동경잡기’ 등 여러 기록 자료를 통해 조선시대까지 이곳 일원을 신성시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는 점도 주목된다고 밝혔다. -불교 성지로 자리 잡은 역사적 가치 경주 금강산 표암봉 일원은 신라 초기 신성한 성지에서 향후 ‘불교의 성지’로서 자리 잡게 되는 역사적 가치도 지니고 있다.   삼국유사 등 여러 사료들에 따르면 신라의 불교 공인은 왕경 귀족들의 반발 등으로 쉽지 않았다. 이런 과정에서 불교가 공식적으로 수용되는데 핵심 역할을 한 것은 이차돈의 순교였다. 삼국유사에서는 순교한 이차돈의 머리가 금강산으로 날아가 떨어졌고, 이 자리에 자추사(지금의 백률사)를 건립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왕경오악의 북악이며, 사령지로 신성시되던 금강산에 이차돈의 순교 과정을 통해 토착(종교)세력과 새로운 이데올로기인 불교가 융합돼가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는 것. 즉 금강산이 신라인에게 건국의 신성한 공간이라는 인식에 불교 성지라는 종교적 신성지의 가치가 더해졌다는 해석이다.-왕경 구조 개편과 의례 공간으로 변모 금강산은 6세기 불교 공인 후 신라왕경의 새로운 구조 개편에 따라 왕경인의 사후 안식처로서의 인식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실질적인 (매장)의례 공간으로 변모했다. 이 같은 현상은 신라 불교 성지로서의 의미가 크게 작용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분 유적인 탈해왕릉(사적)을 비롯해 동천동 고분군이 중리마을에서부터 금강산 정상부까지 넓게 분포하고 있는 점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이들 고분은 6~7세기 무덤군으로 추정되고 있어 불교 공인 후 금강산이 사후 세계의 중요한 안식처가 됐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현상을 불교 공인과 더불어 왕경 도시구조의 확대와 개편, 장례에 대한 인식변화 등 시대적 환경과 조건이 반영된 것으로 보고 있다.-금강산 표암봉 일원 문화재는? 문화재청에 따르면 경주 금강산 표암봉 일원에서 현재까지 확인된 문화재는 모두 15건이다. 국가지정문화재 2건, 경상북도 지정문화재 4건, 비지정문화재도 7건 등 13건이 현존하고 있다. 또 국보인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과 소유권 문제로 보물 지정이 유보된 이차돈 순교비는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보관·전시하고 있다. 국가지정문화재는 경주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보물)과 경주 탈해왕릉(사적)이 있다. 경북도 지정 문화재는 경주 표암(기념물), 경주 동천동 마애삼존불좌상(유형문화재), 백률사 대웅전(문화재자료), 숭신전(문화재자료) 등이다. 비지정 문화재는 광림대 내 석감, 표암 선각화, 백률사 마애탑, 굴불사지, 동천동 선각마애불입상, 동천동 고분군, 이공유허비 등이다. -국보·보물 등 주요 문화재 유래도 ‘주목’ 이번 사적 지정으로 재조명되는 문화재는 바로 경주 표암이다. 표암은 ‘박바위’, ‘밝은바위’를 의미한다. 신라 6촌 가운데 알천 양산촌의 시조 이알평이 이 바위에 내려와 세상을 밝게 했다고 해 표암이라고 부르게 됐다. 기원전 69년 6촌장이 경주 표암에 모여 화백회의를 열고 신라 건국을 의결했으며, 기원전 57년 신라가 건국됐다. 표암은 경주 이씨 혈맥의 근원지인 동시에 신라 건국의 산실이고 화백이라는 민주 정치제도의 발상지인 성스러운 곳이다. 이러한 뜻을 새긴 조선 순조 6년(1806) 유허비가 세워졌고, 1925년 표암재가 건립된 뒤 매년 3월 제사를 지내고 있다. 다음은 백률사다. 신라 불교 공인의 원인이 됐던 순교한 이차돈(506~527)을 기리고자 세운 ‘자추사’(刺楸寺)로, 이후 사찰명이 백률사로 바뀌었다. 사찰 건물은 임진왜란으로 소실돼 재건했다. 백률사 대웅전에 모신 ‘금동약사여래입상’은 통일신라시대 3대 금동불로 꼽힐 만큼 조형 기법이 우수해 국보로 지정됐다.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또 신라 헌덕왕 9년(817)에 백률사터에 세워진 ‘이차돈 순교비’는 일제강점기를 지나며 이동돼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지난 2014년 2월 3일 문화재청이 이차돈 순교비의 보물 지정을 예고했지만, 불교계의 소유권 문제 제기로 현재까지 보물 지정 진행이 중단된 상태다. 또 백률사 초입에 위치한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보물)은 통일신라 8세기경 조성됐으며 높이 3.5m로, 사방에는 각각 다른 불상이 새겨져 있다. 서쪽은 서방 극락정토 아미타삼존불, 동쪽 유리광세계 약사여래, 남쪽 석가여래입상, 북쪽은 미래의 부처 미륵불이 있다.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바위에 몸체를 새기고 머릿돌을 따로 만든 형태다. 굴불사는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경덕왕이 이차돈 순교 사찰인 백률사를 찾았을 때 땅 속에서 염불을 외는 소리가 들려 파보니 커다란 바위가 나왔다. 이 바위의 사면에 불상을 새기고 절을 지어 굴불사라고 했다. ‘동천동마애삼존불좌상’은 금강산 정상 동쪽에 위치한다. 자연 바위벽에 새긴 삼존불상은 높이 3m에 본존불을 중심으로 협시보살이 새겨져 있다. 마모는 심한 상태지만 조각된 옷의 표현과 손의 모습이 돋을새김으로 표현돼 있어 수작으로 평가받는다.-국가지정문화재 지정 추진 10여년 만에 ‘결실’ 경주 금강산 표암봉 일원이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으로 지정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경주이씨 표암화수회는 표암문화재단을 설립하고 지난 2011년부터 네 차례에 걸쳐 ‘표암 학술대회’를 개최하는 등 사적 지정에 노력을 기울여왔다. 하지만 지난 2015년 1월 열린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 심의에서는 역사적·학술적 가치 규명할 수 있는 추가적인 조사·연구 후 재검토해야 한다는 이유로 금강산 표암봉 일원 사적 지정안이 보류됐었다. 당시 문화재위원들은 경주 표암의 경우 삼국시대라고 하는 시대적인 배경, 탄강처로서의 장소성을 뒷받침하기에는 근거자료가 부족한 실정이라며, 추가적인 학술 평가를 통해 사적의 진정성, 완전성, 역사성을 보완해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리고 문화재위원회의 보류 결정 후 7년이 지나 이번에 사적으로 지정됐다. 금강산 표암봉 일원이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크고, 다수의 국가지정문화재가 분포돼있어 사적으로 지정해 체계적·통합적으로 보존해야 한다는 의견이 결정적이었다. 이상걸 경주이씨 중앙청장년회장은 “사적 지정까지는 비록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표암봉 일원의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공식적으로 인증된 것이어서 다행스럽다”면서 “앞으로 표암봉 일원을 보존하고 신라 건국의 상징성과 가치를 높여나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이번 금강산 표암봉 일원의 사적 지정으로 왕경오악 중 동악(토함산), 남악(남산), 중악(낭산), 북악(금강산) 등 네 곳이 사적으로 지정됐다. 서악(선도산)은 지역 주민의 반대에 부딪혀 사적 지정이 무산되는 등 지연되고 있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