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이 낮아 보이는 까닭                                                                       박용하 오랜만에 오는 전화 속에는 계산이 묻어나온다 반갑기보다 저의가 묻어나온다 내심 잘도 잊지 않았구나 싶은데 낯 뜨거운 목적이 속 뜨겁게 올라온다 때로 뻔뻔하고 뻔하기도 하구나 궁금하기도 해서 난 하나도 궁금하지 않는데 넌 먼 강산과 오늘 날씨를 말하더구나 나의 형제들과 출신 성분을 끌어들이더구나 나의 흐린 문장을 말하더구나 뜻밖에 오는 전화 속에는 뜻밖의 일이 없다 쓸개 빠진 덕담과 공허한 잡담 부탁 아니면 둘도 없는 네 외로움 전화를 기다리던 날들이 지나갔다 오랜만에 오는 전화 속에는 얄팍한 산술이 기어 나오더구나 네가 아직도 글을 쓰더구나 나는 내가 쓴 글에 관심 없는데 넌 먼 평판과 오늘 인심을 말하더구나 나의 벌거숭이 문장을 말하더구나 아직도 여전하구먼 하더구나 술에 취해 전화하던 날들이 지나갔다 돈 빌릴 데가 있던 날들이 지나갔다 심심한데 만나서 담배나 한 대 피자는 날들이 가 버렸다 파도의 높이를 향해 떠나가던 날들 역시 감감해졌구나 그럼에도 혹시 돈 가진 거 없냐고 묻더구나 인간에게 향기가 있었던가 나만의 향기 너에의 향기 만물에 다가가는 향기 보고픈 향기 오랜만에 오는 전화 속에는 설렘이 없다 나의 냉대가 있다 -향기가 사라진 인간을 일깨우는 한 통의 전화 박용하에게 사물들이 근원적인 생명력으로 작용하며 “국가의 틈을 비집고 기우뚱……, 폭포와도 같이 거칠게 거칠게 완전히 못 견디며/불타오”(「나무들은 폭포처럼 타오른다」)르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던 시인이 이제는 현실을 관조하고 사유하는 방향으로 시를 경작하고 있다. “거짓말을 끼니처럼 하는 자들”에 대한 이야기(「구름이 높아 보이는 까닭」)에 이어, 이 시에서도 숨기고 싶었던 현대인의 내면을 들여다 보는 일을 지속하고 있다.   바로 “오랜만에 오는 전화 속에” 묻어나오는 저의와 계산을 안쓰럽게 바라보는 ‘나’의 비애이다. “먼 강산과 오늘 날씨”, “나의 형제들과 출신 성분”, “나의 흐린 문장”을 말하는 ‘너’의 말을 듣는 ‘나’의 비틀린 심사는 비아냥의 ‘말놀이’(“낯 뜨거운 목적이 속 뜨겁게 올라온다/때로 뻔뻔하고 뻔하기도 하구나”, “뜻밖에 오는 전화 속에는 뜻밖의 일이 없다”)로 치밀고 올라온다.   번지르르한 상투적인 언술 끝에는 여지없이 “혹시 돈 가진 거 없냐”는 말이 따라 나온다. 평소에는 연락이 없다가 돈이 궁해지니 몇십 년 만에 연락해서 한다는 소리가 얄팍한 산술이 기어 나오는 돈 이야기라니! 술 취해 전화하고, 돈 빌려 달라하고, 만나서 담배 한 대 피자 하고, 파도를 보러 여행 가자는 젊은 날의 낭만, 그 광기와 열정은 다 어디 갔는가? 언제부터 “나만의 향기/너에의 향기/만물에 다가가는 향기/보고픈 향기”가 사라지고 낮게 깔린 구름 같은 말을 참고 들어야 하는가? 그에게 이제 시는 삶의 문제가 되었다. 생명의 분출을 노래하는 시도 좋았지만 당대 세계에 대한 진단과 성찰을 요구하는 시의 역할도 여전히 유효하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