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 장수 소정방은 백제 의자왕이 항복하자 왕과 수많은 백제인들을 잡아 당나라로 끌고 갔다. 전광석화와 같았던 신라와 당의 기습공격에 왕이 피랍되고 수도였던 사비 도성이 함락되었으나 후방에서는 백제인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군사를 재정비함으로써 다시 전황은 혼미해졌다.
이 때 왜국의 실권자 중대형(中大兄) 황태자는 한반도 최근접점인 후쿠오카(福岡)로 직접와 그곳에 진을 치고 파병군을 지휘하고 있었다. 그는 백제와 연락을 취하면서 의자왕의 아들 풍장(豊璋)을 폭풍 속의 백제로 보내 왕으로 추대토록 한 데 이어 세 차례에 걸쳐 5만여명의 병력을 파견하였다.
국운을 건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벌어졌다. 백제와 왜국의 수만 연합군이 신라와 당나라 군을 공격하였고, 신라와 당은 백제 지휘부에 대해 분열책을 꾀하였다. 치열한 심리전은 큰 성과를 거두어 백제왕 풍장이 그간 백제 부흥군의 중심인물이었던 도침 장군을 주살하였다. 백제 부흥군 내부에서 적전분열이 일어났다.
드디어 대규모 국제전은 종말에 다가갔다. 오늘의 서해안 백마강 하구 일대, 전쟁이 시작된지 3년도 더 지난 663년 8월 28일. 백제의 운명을 가르는 전투에 불이 당겨졌다.
결전은 해전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먼저 당나라의 대형 군선 170척이 왜국의 수군 쪽으로 조심스럽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걸 본 왜국군의 지휘부는 자신들이 먼저 엉금엉금 다가오는 당나라 수군을 맹렬히 공격한다면 당나라 배들이 물러설 것으로 예측하고 그들이 후퇴할 때 맹공을 퍼부어 떼로 수장시켜 버릴 작전을 세웠다. 그러나 그날 오늘날까지도 군기 빠진 군대로 악명 높은 당나라군이 웬일인지 물러나지 않았다.
당나라군은 아마도 학익진을 전개하였을 것이다. 그들은 학의 양 날개를 펴 왜국의 수군을 가운데 두고 둘러쌌다. 당나라 군인들은 화공을 펼쳐 왜국의 배에 불을 지르는 한편, 혼란에 빠진 배로 올라와 칼을 마구 휘둘렀다.
한국의 역사서 삼국사기는 이날의 싸움을 두고 ‘불꽃은 하늘을 붉게 물들였고, 바닷물은 핏빛이 되었다’고 기록해놓고 있다. 왜국 수군이 완전히 패배하고 말았던 것이다.
해전에서 승리한 신라와 당나라와 군사들은 크게 사기가 올랐다. 그들은 육지의 백제군에게 공격을 퍼부었다. 마침내 내륙의 거점 주유성까지 함락시켰다.
백제인들에게 청천벽력같은 급보가 전해졌다. 백제인들이 탄식했다. 그날 백제인들의 그 유명한 독백이 일본의 역사서인 일본서기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주유성이 항복하였다. 어찌할 수 없게 되었다. 백제의 이름이 오늘로 끊어졌다. 이제 조상의 묘가 있는 곳을 어떻게 갈 수 있겠는가’
백제군과 그의 처자들은 한반도 남단 대례성(弖禮城)이라는 곳으로 가 철수하는 왜국 수군의 배를 얻어 타고 한반도를 떠나 왜국으로 향했다.
대례성(弖禮城)이 어디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 당시 말로 섬을 `타리`라고 한다. ‘타리’는 ‘대례’와 통한다. 대례성이란 지명으로 보아 남해안 어느 섬에 있던 왜국군의 요새였을 것이다. 학자들은 남해도 쯤일 것으로 추측한다. 누군가 그곳을 논문으로 확정해주면 그날 그곳을 떠났던 수많은 도거인(渡去人)들의 후예가 끝도 없이 마음의 고향을 찾아올 것이다. 조상들의 흔적을 찾는 마음은 그때나 지금이나 같다. 역사는 돈벌이가 되는 학문이기도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떠나간 곳, 오늘날 일본의 탯줄이 끊어진 곳이 대례성이다. 그날 한반도에서는 백제가 멸망하였으나 또 다른 백제가 어머니 한반도의 탯줄을 끊고 왜 열도로 배를 타고 떠나갔다. 음력으로 663년 9월 25일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