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시 강동면 다산마을에 가면 1709년에 세워진 임진왜란 때 순절한 옥구(沃溝)이씨 이희룡(李希龍) 장군과 그의 아들 이문진(李文軫) 그리고 며느리 김씨 등의 충(忠)․효(孝)․열(烈) 행적을 기린 옥구이씨 삼강묘비(三綱墓碑)가 있다.
삼강(三綱)은 임금과 신하(君爲臣綱:忠)․어버이와 자식(父爲子綱:孝)․남편과 아내(夫爲婦綱:烈) 사이에 마땅히 지켜야 할 인간의 기본 도리를 말한다.
이희룡은 임진왜란 때 선조(宣祖)를 의주까지 호위하였으며, 영남의 적을 정찰하라는 왕명을 받아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충주에서 적을 만나 전사하였고, 이 소식을 들은 아들 이문진은 아버지의 시신을 찾으려다 신령에서 적과 대치하다 죽는다. 며느리 김씨는 남편의 시신을 찾아 고산에 장사지냈지만, 시아버지의 유골은 끝내 수습하지 못해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이들의 공을 기리어 조선 숙종 36년(1710)에 벼슬을 올려주고 정려각을 하사하였다.
의령남씨 뇌연(雷淵) 남유용(南有容,1698~1773)은 부친 동지돈녕부사 남한기(南漢紀)․모친 청송심씨(靑松沈氏) 사이에서 서울 서부 사직동 외가에서 태어났으며, 1713년 16세에 기계유씨 유명홍(兪命弘)의 따님과 혼인하였다. 도암(陶菴) 이재(李縡,1680~1746)의 문인으로 오원(吳瑗)․이천보(李天輔)․윤심형(尹心衡) 등과 교유하였으며,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1721년(경종 1)에 진사가 되어, 강릉참봉․세자익위사시직․군자감주부․형조좌랑․영춘현감(永春縣監) 등을 지냈으며, 1740년(영조 16)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제조․대사성․예조참판․예문관제학․홍문관제학 등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고, 특히 1754년에 원손보양관(元孫輔養官)이 되어 어린 정조에게 글을 가르쳤다.
1766년에 삼강묘비의 내력을 기록해 군신․부자․부부 삼강의 기본 도리를 온 고을에 전하고, 상실된 심성을 회복하도록 애썼으며, 경주부윤 홍자(洪梓,1707~1781)가 글씨를 썼다. 1741년에 경상도(慶尙道)에 창건한 서원을 조사한 장계에 의하면, 경술년(1730) 2월에 창건된 단구사사(丹丘社祠)는 의병장 이희룡과 오모재(五慕齋) 권복흥(權復興,1555~1592), 도사(都事) 이문진 등을 제사지내는데, 재임한 감사는 박문수(朴文秀,1691~1756), 부윤(府尹)은 이중관(李重觀:재임1728.08~1730.08)이었으며, 일에 앞장서 주도한 유생은 이석표(李碩標)였다.이씨삼강묘비명 병서(李氏三綱廟碑銘 幷序) - 남유용 하늘이 사람을 만들 때 큰 도리와 큰 규율이 있었으니 삼강(三綱)을 말한다. 하루라도 이것이 없으면 백성은 살아갈 수 없고, 제왕도 나라를 다스릴 수 없다. 하지만 교화(敎化)는 성했다가 쇠퇴하기 쉽고, 인심(人心)은 포기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때문에 선왕은 이 규율을 삼았다. 그 충정(忠旌)과 효표(孝表)와 열(烈)을 드러내어 백성을 움직이게 하고, 세상에 모범되게 하려면 그 근원을 다스려 확산을 막아야하는 까닭이다. 아! 온 고을을 통틀어 한 사람의 충(忠)과 한 사람의 효(孝)와 한 부인의 열(烈)을 구하고 숭상함이 때로는 드물도다.
만약 한 가정 내에 신하가 임금을 위해 죽고, 자식이 부모를 위해 죽고, 부인이 남편을 위해 죽어 삼강의 온전함을 얻은 자 역시 천하에 한 명일 것이다. 나는 고(故) 감찰 이 공의 가전(家傳)을 읽으며 일찍이 눈물을 흘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이휘룡의 자는 응서(應瑞)로 선대는 옥구(沃溝)인이다. … 병법과 말 타고 활쏘기를 좋아하였고, 무과에 뽑혀 사헌부 감찰에 천거 충원되었다. 임진왜란 때 왜놈들이 쳐들어오자 공은 의주에 왕을 따라 영남의 적병을 정찰하는 명을 받았다. 이때 적은 호남과 영남에 걸쳐 진을 쳐서 천리 길에 사람의 흔적이 없었고, 공은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경주와 울산 사이를 출몰하여 적의 허실과 완급의 상태를 다 알아냈다. 장차 다시 되돌아가는데 충주에 이르러 적을 만나 나아가지 못하게 되었다. 이에 공은 “왕명을 받는 몸이거늘 진실로 욕을 당할 수는 없다. 차라리 나아가 적과 싸워 죽음으로 임금께 알리리라”하고는 마침내 혼자 몸으로 힘써 싸우다 죽었다.
공의 아들 이문진이 부친의 사망소식을 듣고는 일어나 길을 떠나는데, 길에서 곡을 하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장차 충주에 이르러 공의 시신을 찾는데, 신녕(新寧)에 이르러 적을 만나 길이 막혀버리자 분개하며 “나는 이 도적들과 같은 하늘 아래에서 함께 살아갈 수 없다.”말하고 마침내 돌진해 힘써 싸우다가 죽었다. 그의 아내 김씨가 남편의 소식을 듣고는 곡하며 “내 시아버지는 충을 하다 돌아가셨고, 내 남편은 효를 하다 죽었으니, 나는 내가 죽을 곳을 안다. 하지만 유골을 수습해 고산(故山)에 묻고 나의 뜻을 결행하리라”집안에 맹세하였다.
걸어서 전장에 이르러 두루 들판 사이를 찾는데, 마침 비바람이 심해져 묻지 않은 시체들이 드러나 서로 뒤엉켜 살필 수가 없었다. 3개월을 찾았으나 시신을 찾지 못하자 울며 여종에게 “나는 오늘 죽을 것이니 반드시 남편의 옷가지로 나를 장사지내다오”라 말을 마치고는 따라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