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를 돕고자 왜국의 수뇌부가 아스카에서 후쿠오카(福岡)로 옮겨와 전쟁지휘부를 차린 지 겨우 4개월여 지났을 무렵이었다. 제명천황이 후쿠오카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그녀의 나이 67세였다. 고령의 여자 몸으로 도읍 오사카에서 군선을 타고 낯선 후쿠오카까지 와 병영 생활을 한 여독이 그녀의 건강에 큰 무리를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곧바로 황위를 이어받았어야 할 중대형 황태자는 천황 자리가 비었음에도 즉위를 미룬 채 소복을 입고 정무를 처리하였다. 그가 즉위를 늦춘 것은 백제 파병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실제 중대형 황태자가 즉위하기로 한 것은 백제에서의 전쟁이 일단락되고 나라가 어느 정도 안정된 7년 후에야 가능했다.
역사서를 살펴보면 이 무렵 후쿠오카에서 어떠한 일이 처리되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가 있다. 제명천황 사망 한 달 뒤인 8월 백제로 갈 장군들이 결정되었고 각지에서 징발된 병사들과 전쟁 물자들이 후쿠오카로 속속 집결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에 대한 최종 군사훈련이 밤낮없이 실시되고 있었을 것이다. 9월에는 왜국에 와 있던 백제왕자 풍장(豊璋)을 귀국시켜 백제의 왕으로 추대토록 하였다. 예민하고 복잡한 업무들의 연속이었다. 폭주하는 일정으로 인해 국가적 경사여야 할 즉위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즉위는커녕 어머니의 장례조차 치를 수 없을 지경이었다.
왕자 풍장이 백제로 떠난 다음에야 한숨 돌린 중대형 황태자는 제명천황의 장례를 치렀다. 그해 10월, 제명천황의 운구가 도읍 아스카를 향한다. 이때 중대형 황태자가 만엽집 15번가를 만들었다. 이를 해독해보자.
渡津 / 海 乃豊旗 雲 尒 / 伊理比 沙之 / 今夜 乃 月 夜 淸明 己曾
“그대께서 물을 건너려 하시는 나루터. / 바다에는 구름이 없고 파도는 잔잔해야 하리. / 그대께서는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 나와 함께 하셨지. / 오늘 저녁에 달이 밤늦도록 선명하고 밝아야겠지”
독자들께서는 본 작품의 내용 중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 나와 함께 하셨지’라는 구절을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이다. 중대형과 어머니 제명천황의 정치역정을 고스란히 반영한 구절이기 때문이다. 중대형은 일찌기 어머니(皇極天皇)의 면전에서 국정을 농단하던 권신 소아입록(蘇我入鹿)을 암살하며 왜국의 실권자로 떠올랐다. 그후 ‘대화개신(大化改新)’을 추진하여 나라의 면모를 일신하였고 그 과정에서 효덕천황을 정치적으로 고립시키기도 하였다. 또한 어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효덕천황의 아들이었던 유간황자를 처형하기도 하였다. 중대형 황태자는 무엇보다도 백제 구원군 파병을 결정하였다. 이들 모두가 자신과 어머니, 그리고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는 정치적 결단들이었다.
권력쟁취와 유지 과정에서 어머니 제명천황은 묵묵히 아들 중대형과 정치적 행보를 같이했다. 중대형은 ‘그대께서는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 나와 함께 하셨지(伊理比 沙之)’라 하며 어머니의 일생을 회고하는 것이다. 손을 잡고 폭풍이 부는 험한 바다를 항해하던 모자의 여정을 15번가는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을 일본인들은 다음처럼 해독한다.
“넓은 바다 위 풍성한 구름 위에 석양 비치니 오늘 밤 뜨는 달은 청명하길 바라네”
일본인들의 해독 결과와 제명천황 사망 전후의 역사적 사실 사이에는 아무런 상관관계가 발견되지 않는다. 만일 그들의 해독이 옳다면 중대형이 자신의 정치적 동반자였던 어머니를 추모하는 글에 단 한 톨이라도 역사적 진실이 발견되지 않을 리 없다. 텅 빈 깡통에 불과한 일본인들의 해독 결과를 믿기가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