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린 사람
기형도
사회자가 외쳤다
여기 일생 동안 이웃을 위해 산 분이 계시다
이웃의 슬픔은 이분의 슬픔이었고
이분의 슬픔은 이글거리는 빛이었다
사회자는 하늘을 걸고 맹세했다
이분은 자신을 위해 푸성귀 하나 심지 않았다
눈물 한 방울도 자신을 위해 흘리지 않았다
사회자는 흐느꼈다
보라, 이 분은 당신들을 위해 청춘을 버렸다
당신들을 위해 죽을 수도 있다
그분은 일어서서 흐느끼는 사회자를 제지했다
군중들은 일제히 그분에게 박수를 쳤다
사내들은 울먹였고 감동한 여인들은 실신했다
그때 누군가 그분에게 물었다, 당신은 신인가
그분은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당신은 유령인가, 목소리가 물었다
저 미치광이를 끌어내, 사회자가 소리쳤다
사내들은 달려갔고 분노한 여인들은 날뛰었다
그분은 성난 사회자를 제지했다
군중들은 일제히 그분에게 박수를 쳤다
사내들은 울먹였고 감동한 여인은 실신했다
그분의 답변은 군중들의 아우성 때문에 들리지 않았다
-‘홀린 사람’을 양산해내는 ‘홀린 사회’
어디 익숙한 풍경 같지 않은가? 조금 과장되었을 뿐이지 오늘 바로 당신이 출근길 사거리에서 만나는 모습이고, 집에서 지하철에서 커피숍에서 당신이 빠져서 보고 있는 유튜브 영상이나 SNS의 그 모습이다.
거리에서, 토론회에서 만나는 동시선거의 출마자들은 이 시의 ‘사회자’의 말에 나오는 ‘이분’처럼 경우는 좀 다르지만 “일생 동안 이웃을 위해 산 분”으로, 이웃의 슬픔에 “이글거리는 빛”으로 격하게 반응하고, “하늘을 걸고 맹세”하건대 “자신을 위해서는 푸성귀 하나 심지 않았”으며, “당신들을 위해 청춘을 바”치다 못해 “죽을 수도 있”는 사람들로 포장되고 있다. 확성기에서는 이런 과장과 미화의 언어들이 흐느끼듯 넘치고, 그 말에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군중들은 출마자들을 연호하고 박수를 치고, 심지어 실신하기까지 하는 광기를 보여준다.
그런 완벽한 인간이 어디 있겠는가? 있다면 ‘신’이거나 실체가 없는 ‘유령’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런 권력자의 실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들은 맹목적 추종자들, 군중들의 아우성 때문에 들리지 않거나 묵살된다.
기형도의 이 시에는 세 가지의 부류가 존재한다. 선동가인 사회자, 맹목적 추종자인 군중, 음험한 권력인 ‘이분(그분)’. 그 중 권력자인 ‘그분’은 군중들 앞에서는 그 분위기를 기회로 잡기 위해 “흐느끼는 사회자”를 제지하는 여유를 연출한다. 사회자로 하여금 하늘을 걸고 맹세까지 하게 한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하늘이 저들을 걸고 넘어지지 않으니 저들이 하늘을 걸어버렸나 보다. 이 시는 기만적 통치술을 통해 대중을 복종시키는 교활한 지도자에 대한 풍자이면서, 비판적 사고를 잃어버린 대중에 대한 비판을 위해 쓰여졌다.
냉정하게 말해 지금이 수십 년 전의 그때와 많이 달라졌는가? 오히려 권력과 한통속이며 하수인 격인 사회자는 더 교활한 모습으로 자꾸 몸집을 불려가는 유투브와 같은 개인 매체가 되어 이미지 조작술과 과장과 미화라는 정치적인 언어들로 우매한 대중들을 선동하며 갈라치기하고 있지 않은가? ‘홀린 사람’을 양산해내는 ‘홀린 사회’에서 한 발 물러서서 생각해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