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악서원에서 선도산 방향으로 마을길을 따라 도봉서당을 지나 산길을 오르다보면 오른쪽에 1870년경 건립된 도산재(桃山齋)가 나타난다. 도산재 주변에는 2008년 세워진 헌성록(獻誠錄)이 있고, 뒤편에는 2002년 세워진 9기(고려 吳威·吳永老·吳均, 조선 吳彦棧·吳終愼·吳誠愼·吳貴宗·吳繼宗·吳世謙)의 비석이 있다. 도산재는 고창오씨 복양선생(濮陽先生) 죽림칠현 오세재(吳世才,1133~?)를 모신 공간으로, 대호군 인재(忍齋) 오사원(吳士元,1500~?), 함창현감을 지낸 경서재(敬恕齋) 오경노(吳敬老,1526~1591), 군기시 직장으로 임란 때 창의한 충서재(忠恕齋) 오경우(吳敬友,1530~1597), 임란 때 창의하여 훈련원 주부에 오른 송강(松岡) 오심(吳愖,1563~?), 임란 때 창의하여 군자감정을 지낸 송재(松齋) 오열(吳悅,1567~?), 부산포 진관과 축산포 수군만호를 역임하고 경주부 행수(行首)를 지낸 충헌(忠軒) 오필환(吳必寏,1639~1695) 등의 제위가 모셔져 있다. 오심이 임진왜란 때 여막(廬幕)을 짓고 시묘(侍墓)하던 초옥을 보수하여 재실(齋室)로 이용하였고, 이후 오필환이 행수로 있을 때 사당건립을 위해 유림에 상정한 일이 있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특히 오상립·오상래·오학종·오학직·오상도·오상원·오상윤 등 문중 대표의 발의에 의해 도산재를 도산서원(桃山書院)으로 승호하고, 오세재를 주향으로 모시려 했으나, 서원철폐령에 따라 이루지 못하였다. 훗날 초가집 3칸을 확장 보수하여 파선조 이하 여러 대를 모신 재사(齋舍)로 삼아 추모의 정성을 다하였고, 이후 근래까지 2번의 중수(重修)를 하였다. 재실 내부에는 1900년 권일섭(權一燮)이 지은 상량문과 1908년 후손 오세근(吳世根)·황헌의 기(記) 그리고 표성록(表誠錄) 등이 있으며, 한켠에 오세재선생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오세재는 한림학사 오학린(吳學麟)의 후손으로, 조부는 직한림(直翰林) 오질(吳質), 부친은 탁라도(乇羅道:제주도) 구당사(句當使) 오인정(吳仁正,1100~1155)으로, 1133년 송도성 서쪽 성내리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빼어난 자질이 있었고, 충숙공 문극겸(文克謙), 평장사 정의공 한문준(韓文俊)을 스승으로 모셨으며, 18세 1151년에 예부시험 진사에 합격하였다. 37세 1170년에 정중부의 난이 일어나자 이인로(李仁老)·임춘(林椿)·조통(趙通)·황보항(皇甫沆)·함순(咸淳)·이담지(李湛之) 등과 중국 진나라 초기 노장사상과 무위자연을 논하던 죽림칠현(竹林七賢)을 표방한 죽림고회(竹林高會)를 결성하고 시문으로 시대를 비판하였다. 이후 49세 1182년에 문과에 급제하였지만, 벼슬을 멀리하였고, 만년에 외조부의 출생지인 경주로 제고사(祭告使)의 축사가 되어 돌아왔다. 56세 1189년에는 최치원 유지에서 6년을 거주하며 후학양성에 힘썼으나, 결국 가난에 시달리다 죽었다. 백운거사(白雲居士) 이규보(李奎報,1168~1241)는 35년의 나이 차가 있었지만, 나이를 잊은 교우를 맺었고, 칠현설(七賢說)·오선생덕전애사 병서(吳先生德全哀詞 幷序) 등을 통해 둘의 관계를 드러냈으며, 현정선생(玄靜先生)이라 사사로이 시호하였다. 3형제가 모두 문장으로 이름이 날렸는데, 첫째 오세공(吳世功)은 고려 17대 의종 때 청주목당서기(淸州牧掌書記)와 19대 명종 때 경상도 안찰사(按察使)를 지냈다. 둘째 오세문(吳世文)은 1152년 승보시(陞補試)에 급제하여 한림학사·동각학사 등을 지냈으며, 가사문학(歌辭文學)의 효시인 역대가(歷代歌)와 조수론(潮水論)·군충시(羣蟲詩)·삼백운시(三百韻詩) 등의 저서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셋째 오세재 역시 뛰어난 문장가였으며, 지금도 고등학교 교과서에 그의 한시가 등재되어 있고, 경주의 황성공원․고창의 문학비공원에 시비(詩碑)가 세워져 있다. 도산재기 - 승문원 부정자 황헌 경주부의 서쪽 선도산 하늘 높은 곳에 신라 성모사(聖母祠)가 있다. … 동쪽으로 푸른 바다와 접하고, 큰 강이 좌우를 두른다. 넓은 들판 열린 가운데에 인물과 누대·옥과 비단을 실어나르는 배와 수레의 승경이 영남에서 최고이다. 옛적 복양 오세재 선생께서 물러나 한가로이 머문 곳이다. 숲과 산, 물과 돌은 여전히 향기의 자취를 머금고, 오직 산의 들판엔 호랑이가 움크린 듯 용이 날아오르는 듯 선생께서 묻힌 곳이다. 당세 문형(文衡)은 문안공(文安公) 유승단(俞升旦)이 선생의 재주와 학문을 극칭하였고, 문순공(文順公) 이규보는 선생의 글을 한유와 두보에 비교하였고, 서문과 애사를 지었으며, ‘현정(玄靜)’이라 사시(私諡)하였다. 문충공(文忠公) 이제현(李齊賢)은 역옹패설(櫟翁稗說)에 선생의 풍자를 실었다. 갑진년에 단(壇) 아래에 집 하나를 지었는데, 정당(正堂) 4칸, 고자실(庫子室) 4칸 총 8칸을 짓고는 ‘도산재’라 편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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