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산책 단석산 마애불상군 사유상(思惟像)의 깊고 깊은 고뇌(苦惱) 11월 2일. 경주박물관대학 문화재답사일행에 끼어 단석산 마애불상군으로 향했다. 따스한 햇살에 우중골을 1시간쯤 올라가니 재건축 공사가 한창인 신선사가 보였다. 햇살에 뭔가 번쩍번쩍 하길래 고개를 돌려보니 석굴 마애불상군을 덮어씌우고 있는 육중한 철구조물과 상단부에 반원모양의 유리덮개가 눈에 확 띄었다. 단석산 마애불상군은 충북 충주시 가금면 봉황리 햇골산 마애불상군과 유사점 많고, 일반적인 마애불은 독존불(獨尊佛)이거나 삼존불(三尊佛) 형식인데, 이 두 마애불군은 수많은 보살이 군집을 이룬 특징이 있다. 두 마애불군은 공히 사유상(思惟像)을 중심으로 한 불보살군(佛菩薩群)과, 여래(如來)를 중심으로 한 공양상(供養像) 두 군집으로 나뉘어 있다. 그런데 경주 단석산 마애보살군 유적은 네 개의 거대한 암석이 東南北 三面에 병립되어서 천연의 ㄷ자형 석실(石室: 지금은 윗 지붕이 없어지고, 발굴조사시 기와 조각등이 발견 되었음)을 이루고 있으며, 각 면에 불상들이 도합 열 구가 부조되어 있다. 남면 하단에 20행으로 갓 행 19자씩 합계 380자의 장문의 음각명문이 있는데, 마멸이 심하여 절반 가량 해독된 銘文에 의하면 “神仙寺”라는 사찰명은 육안으로도 확인 되고, 정밀탁본에 의하면 “作彌勒石像一區高三丈菩薩二區” 글귀에 의하여 미륵삼존불(彌勒三尊佛)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답사에서 돌아와 며칠이 지난 아직까지 선명나게 기억나는 것은 ㄷ자형 네 개의 암석중 바깥쪽(서편) 북암(北巖)의 새겨진 사유상(思惟像)을 중심으로 한 불보살군이다. 높이 1.1미터로 三山冠을 썼으며 원형 頭光이 있고 빰에 댄 오른 손가락들은 매우 서투르며 왼손도 윤곽만 표현한 섬세하지도 않은 치졸한 맛을 느끼게 하는 사유상(思惟像). 그런데 이 사유상을 향하여 보살상들 세 구가 두 손으로 사유상을 가리키면서 병렬해 서 있다. 좌측 하단부에 조그만 여래입상 한 구가 있고, 특이 한 것은 사유상 바로 밑에 미륵본존(彌勒本尊)을 향해 한쪽 무릎을 꿇고 병향로(柄香爐)와 수지(樹枝)를 각각 받들고 공양하는 두 인물이다. 우리 경주엔 신라유적은 많아도 정작 그 시대 사람들이 옷차림은 알 수가 없었는데, 머리에 긴 고깔 모양의 모자를 쓰고 저고리와 통바지 차림의 이 작은 두 공양상(供養像)은 古신라 의복 연구에 아주 소중한 사료란다. 그리고 사유상 왼쪽의 세 불보살 중 첫 번째와 세 번째 여래입상은 둘 다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우견편단(右肩偏袒) 차림인데, 이러한 우견편단의 착의법은 중국 수(隋)나라 때 유행하는 것이어서 단석산 마애불군은 7세기 초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단다. 단석산 마애불군 유적은 ‘미륵삼존’과 ‘신선사’의 銘文기록으로 볼 때 신라 화랑도와 관계있는 미륵도장으로 추정된다. 화랑도는 신선을 숭상하는 풍류도로서 신선을 불러 미륵선화라 하였고, 신선(神仙)=미륵선화(彌勒仙花)=미륵불(彌勒佛)=화랑(花郞)의 상관관계가 추론된다. 그러므로 단석산 유적에 보이는 미륵불과 공양상은 바로 화랑과 랑도(郞徒)들이 미륵상을 공양하고 신봉하는 장면으로 해석을 하곤 한다. 미륵불은 미륵하생(彌勒下生)을 나타내고, 사유상의 보살은 미륵상생(彌勒上生)을 나타낸단다. 즉 “인간세계의 하생신앙과 도솔천의 상생신앙이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하나가 되어 미륵신앙을 완성한다”는 불교문화재 초보자인 나로서도 이해하기 힘들고, 다만 어렴풋이나마 고개를 그떡일 수 있는 그런 깊은 뜻이 있단다. 신라에는 도교의 신선사상(神仙思想)과 불교의 미륵신앙(彌勒信仰)이 융합하여 현세적 색채가 강한 風流徒(화랑도)가 성립되었다고도 한다. 단석산 마애보살군은 고대사의 사상적.문화적.미술사적 연구가치가 높은 소중한 유적이다. 신라 단석산(斷石山)은 조선시대부터 ‘김유신이 보검으로 돌을 베었다’는 전설과 함께 붙여진 이름이고, 원래 신라시대는 월명산(月生山)이었다는 안내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찬찬히 유적을 둘러보던, 그 날 답사에 참석한 120 여명의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지적한 것은 철구조물과 유리덮개였다. 원래 목조기와 지붕의 석굴(石窟)유적이었음은 발굴유물을 보지 않은 문화재초보자도 알 수가 있는데, 철구조물과 유리덮개는 정말 안 어울렸다. 마치 고속전철 신선사역(?)으로 착각케 한다. 양북의 골굴암도 비슷한 전철역사(?)가 세워졌다니 안타까울 뿐이다. 바위를 굴착하고 시멘트를 땜질한 임시방수공사는 하루빨리 철거되야 한다. 문화재공사 설계와 공사과정에 심사하고 자문했던 문화재위원들이 과연 이 현장을 와보았는지 의심이 간다. 천 수 백년을 견뎌왔고 앞으로도 수 천년의 풍파를 견뎌내어야 할 소중한 문화유적에게 제대로 고증된 목조기와지붕을 찾아주자. 古拙한 맛보단는 稚拙한 맛이 더 풍기지만 어리석은 후손들의 어슬픈 보수공사에 마음 속으로 눈물을 흘리면서 깊이 깊이 苦惱하는 그 사유상(思惟像)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선하다. 단석산 사유상(思惟像) 얼굴에 밝은 미소를 찾아드리게 해 줄 날은 언제쯤 찾아오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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