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강읍 산대리 안강운동장을 지나 북쪽으로 들어가다 보면 안동권씨 재실 호계서사(虎溪書社)를 만난다. 열화문(悅化門)을 통해 안으로 들어서면 정면에 경의당(景義堂) 강당이 보이고, 내부에는 여강이씨 이영원(李榮源)의 호계서사복원기(虎溪書社復元記), 여와(餘窩) 목만중(睦萬中,1727~1810)의 호계사기(虎溪祠記), 간옹(艮翁) 이헌경(李獻慶,1719~1791)의 사당기(祠堂記) 등 현판이 걸려있다. 뒤편에는 임란공신 매와(梅窩) 권사악(權士諤,1556~1612)과 향오(香塢) 권찬환(權瓚煥,1782~1836)을 배향한 상덕묘(象德廟)가 있다.
호계사(虎溪祠)는 권사악의 후손들이 사대봉사(四代奉祀)를 넘어 대대로 제향(祭享)의 예를 행하고자 사당을 지은 것으로, 지금의 호계서사는 1786년에 세워졌다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것을 2001년에 복원 중건하였다,
의병장 권사악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37세에 의병을 일으켜 경주판관 박의장과 문천(蚊川)에서 회맹하고, 손시(孫時,1555~1603)와 최진립(崔震立,1568~1636) 그리고 의병장 권응수(權應銖,1546~1608) 등과 힘을 합쳐 영천성을 수복하였다. 복재(復齋) 정담(鄭湛,1552~1634)이 지은 영천복성기(永川復城記)를 보면, “임진년 7월 왜적이 영천성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의병대장 권응수는 추평에 진을 치고 적의 형세를 엿보고 있었다. 그때 경주의 선비 권사악은 손시, 최진립과 함께 정예병사 수백명을 이끌고 우항의 뒷산에 올라 두 부대가 합세하여 작전을 도모하여 성 전체의 왜적들을 불을 질러 섬멸하고 우리 남녀 1900명을 데리고 나왔다.”
당시의 상황을 묘사하였고, 경주부윤 홍양호(洪良浩)가 쓴 「유사」에 그의 의병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게다가 매헌(梅軒) 권사민(權士敏,1557~1634), 노헌(魯軒) 권응생(權應生,1571~1647) 등 경주지역의 안동권씨 가문은 충의지사가 많이 배출되었다. 이후 권사악은 울진현령 겸 강릉진관 병마절제도위에 임명되어 부임하였으나, 안강의 호계동으로 돌아와 침류정(枕流亭)을 짓고 살았다.
권찬환은 증조부 권석제(權錫濟)·조부 권이복(權爾復)·부친 권동진(權東鎭)의 가계를 이루며, 문장에 뛰어났다. 헌종 1년(1835)에 증광시 병과 24위로 급제하였으나, 안타깝게도 다음 해 병으로 생을 마감하였고, 이후 조정에서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 겸 춘추관기사관(兼春秋館記事官)에 증직시켜주었다.
이헌경은 영조·정조년간 4대 문장가로 동국문장으로 불렸다. 1743년 진사에 급제하여 사서·지평·사간원사간·홍문관수찬 등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고, 1784년에 대사간이 되었다. 호계서사 강당에 걸린 강당기(講堂記)는 이헌경의 『간옹집』에 「호계사 강당기(講堂記)」로 되어있으며, 후손인 권덕환(權德煥)이 사당이 완성되자 서울로 이헌경을 찾아가 글을 요청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호계사 강당기 - 간옹 이헌경권덕환(權德煥)이 경주에서 서울로 올라와 나[이헌경]를 찾아 호계사(虎溪祠) 완공을 고하고 그 사적을 기록한 글을 청하였다. 나는 “사당은 누구를 모셨는가?”라 하니, 권덕환이 “선조 매와공께서 공덕이 있어 대대로 제사를 지냈습니다. 제사지내는 사대봉사 대의 수가 다 되고 바뀜을 지나치지 못하고, 자손들이 의논하여 호계에 별도의 사당을 세웠습니다.”라 하였다. 머지않아 영남의 여러 고을 선비들이 뜻을 같이하여 말하길, “공은 죽림(竹林) 권산해(權山海,1403~1456)선생의 방손이고, 귀봉(龜峯) 권덕린(權德麟,1529~1573)선생의 종자(從子:조카)이다. 두 선생의 절의와 학행을 앞에서 배태(胚胎於先)하였고, 뒤에 훈도(薰陶)받았다. 공의 특출한 행실은 진실로 남달랐다. 임진왜란에 우리 영남이 먼저 해를 당하자, 영천 전투, 형산강 전투, 화왕산 수비에서 혹은 분격하여 섬멸하고, 혹은 기미를 계산해 유인하고, 혹은 명성과 위세로 두렵게 하였다. … 우리 영남사람이 비록 집집마다 향을 태우고 제사를 지내더라도 공의 공덕의 만의 하나를 갚기에도 오히려 부족하다. 지금 그 제사가 자손들이 사사로이 사당을 짓는 경지에 이르렀고, 우리 영남사람들이 대대로 잊지 않는 의로움을 생각한다면 어찌 이다지도 박대하겠는가?”라 하니, 모두가 “그렇습니다.”라 하였다. … 이에 그 묘우(廟宇)․당단(堂壇)․낭무(廊廡)를 조금 넓혀 크게 하였다.
마치 자옥(紫玉)이 그 서쪽에서 솟고. 덕계(德溪)가 그 북쪽에서 휘감는다. 검푸른 떨기는 그림을 펼친 듯, 맑은 물결 비단이 출렁인다. 성근 구름은 멀리 비추고, 어슴푸레한 달빛은 홀로 흘러간다. 영혼이 오고가며 즐기고, 고상한 풍도를 흠모하기에 좋으니, 이것이 호계사의 빼어난 경치이다.
귀봉은 회재 문하의 제자였고, 공이 학문을 물었으니, 진실로 학문의 연원이 있다. … 아! 애석하도다. 공은 일개 서생으로 충의분발하여 자신을 바쳐 온갖 죽음을 무릅쓰고 임금의 원수를 토벌하고, 백성의 목숨을 구하였다. 지금까지 공렬(功烈)이 빛나고, 백성 모두 그를 생각함은 가히 귀봉의 학문이 전함과 죽림의 명성과 절개의 계승이 있었다고 말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