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 우리를 망쳐 놓았지만 그래도 상관없다(History failed us, but no matter). 단호한 이 첫 문장은 ‘파친코(이민진 지음, 이미정 옮김 / 2018)’의 주제이다. 승자가 기술한 역사에 패자는 상상으로 존재한다. 제왕과 장군의 이야기로 가득한 역사에 보통사람은 없다. 찬란한 유산인 궁전에도 벽돌을 쌓은 일꾼의 이야기는 없다. 하지만 굴곡진 시간과 거친 공간 속에서도 민초들은 삶을 이어간다. 아메리카 흑인이 그랬고, 유럽 유태인이 그랬고, 강제병합 당한 조선인이 그랬다. 나라가 사라지고 일본에서 살 수밖에 없었던 조선 디아스포라는 일본에서 2등 시민 자이니치로 살 수밖에 없었다. 이 소설은 정치사회적 담론이 아닌 그 시공간을 살아온 파친코 주변의 조선 디아스포라(diaspora : 특정 민족이 자의적, 타의적으로 기존에 살던 땅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여 형성하는 공동체)의 궤적을 속도감 있게 보여준다. 읽는 내내 오사카 거리를 헤매고 있었다.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쓰여진 파친코에서 작가는 모든 인물에게 애정을 보인다. 각자의 과거를 설정하고 모티브를 준다. 인물의 세계관과 라이프 스타일은 다르지만 선과 악으로 그들을 구분하지 않는다. 줄거리는 매우 단순하다. 부산 영도에서 살았던 선자는 재일동포 한수와 사랑에 빠져 임신했지만 백이삭과 결혼하게 되고 이삭의 형 요셉(경희)이 있는 오사카로 이주한다. 거기서 아들 노아, 모자수와 손자 솔로몬과 같이 파친코 주위에서 살아간다. 소설에는 4세대의 걸쳐 20명 정도의 인물이 등장한다. 그 각각 다른 세대들의 삶을 통해 디아스포라가 살아가는 험난한 과정을 읽을 수 있다.
소설은 한편에서 양진, 선자, 경희, 에쓰코와 하나를 통해서 여성이 남성중심 시대를 살아 내는 것이 어떤 것인지 어떤 운명인지도 보여준다. 남자에 의해서 삶이 규정되는 이 여자 캐릭터를 보면서 여자라는 자체가 2등 시민이었던 옛날을 상상해 보았지만 이 상상은 참으로 어렵다. 그들이 페미 논쟁이 한창인 한국에 온다면 어떤 선택을 할지 궁금하다.
이 소설을 작년 여름에 읽었는데 읽는 동안 잠시도 내 손을 떠나본 적 없을 정도로 몰입했다. 마음으로는 바삐 읽었는데 글 한 줄 한 줄이 다 가슴에 들어와 나의 글 읽어내는 속도가 이렇게도 늦은가 싶을 만큼 정독했다. 그것은 마치 채널 선택권이 별로 없었지만 그래서 더 갈급했을지 모를 텔레비전이 아주 많이 인기 있던 시절, 마치 매주 아슬아슬한 장면에서 끊어내어 다음 주가 또 조바심 나게 기다려지던 인기 주말 TV 드라마처럼 한 단원이 끝나기도 전에 다음 단원이 먼저 기다려지는 듯한 몰입이었다.
아침부터 읽기 시작한 이 소설로 인하여, 오후 절친과의 약속 장소로 오가는 길에서도, 또 만난 중에도 얼른 집으로 돌아가서 책 읽기에 몰입하고 싶었다. 친구를 만나러 지하철 입구로 올라오는 에스컬레이터 속에서도 한 손에 책을 들었고 한 손에 교통카드를 들었지만 온통 책 속에 눈과 머리를 둔 바람에 출입구를 잘못 나오게 만들 정도였다.
영문판 3부(1962~1989)를 시작하면서 국가는 상상의 정치공동체(Nation is an Imagined Political Community)라는 역사정치학자 Benedict Anderson(1936~2015)의 주장을 길게 인용한다(324쪽). 앤더슨은 Imagined Communities(1983)에서 민족은 민족주의 지식인들이 만들어낸 ‘상상의 공동체’라고 주장하며 민족이 ‘영속주의적’ 공동체라는 주장에 반대한다. 앤더슨은 상상의 공동체로서의 민족에 대한 인식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것으로 ‘인쇄 자본주의’로 주장한다. 문필가들이 라틴어가 아닌 지방어로 저술하기 시작하면서 지역별로 민족의식이 강화되었다고 본다. 이 주장은 유럽 사례를 근거로 제시하지만 수만 년 동안 지리적으로 분리된 한국과 일본을 보면 일반화되는데 한계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선자 가족의 굴곡진 삶을 통해서 인종, 국가라는 이름으로 벌어지는 차별을 보여주고 싶었으리라.
오늘날 전 세계는 디아스포라가 넘치고 미국은 이민으로 일등 국가가 되었지만 ‘파친코’같은 차별은 사라지기 어려울 것이다. 그 속에서 많은 나라의 이주민, 디아스포라들이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집단을 이루어 살아가고 있다. 차이나 타운과 코리아 타운은 그런 예들 중 가장 극명한 경우다.
우리나라 역시 다르지 않다. ‘다문화가정’이라는 이름으로 어쩌면 분리 되어진 그들의 삶이 또 다른 ‘파친코’ 속 주인공들로 우리 속에서 부대끼고 있지 않을지, 소설 파친코를 보면서 다시 한번 조용히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이런 마음을 일으키게 한 것만으로 파친코는 다양한 디아스포라가 살고 있는 우리 시대 한국인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