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령봉표는 조선조 효명세자의 묘에 쓸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숯을 구울 나무를 베지 못하게 금한다는 내용의 표지석이다. 비스듬히 쓰러져 있는 바위면에 ‘延慶墓香炭山因啓下佛嶺封標(연경묘향탄산인계하불령봉표)’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이 봉표는 1831년(순조 31) 10월에 새긴 것으로, 순조의 아들이었던 효명세자(1809-1830)의 봉제사에 따른 경비를 조달하는 산이니 일반인의 출입과 벌채를 금한다는 내용의 표지석이다.
효명세자는 조선 후기의 세종대왕이 될 것이라 기대를 모았었다. 그런데 자신의 봉제사 경비를 조달하기 위해 봉표를 세우고 백성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지하의 세자 마음이 무척 불편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주목할 점은 인근지역에 또 다른 2기의 봉표가 있으니 시령봉표와 수렴봉표이다. 시령봉표는 양북면 용동에서 장기로 넘어가는 감재골 고개 위에 불령봉표와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봉표를 새긴 인물과 날짜까지 새겨져 있는 점이 불령봉표와는 차이가 있다. 수렴봉표는 양남면 수렴리에 있다. 내용은 역시 불령봉표와 같으나 봉표를 세운 날짜가 신묘년 10월이다. 이 봉표를 세울 때 관련된 인물로 묘감 김창호와 감동 이○희가 등장하고 있고 그 외에 세 명의 인물이 추가되어 있는데 부○ 김하용, 이(吏는 관리를 의미) 박동윤, 하학로 등이다. 그런데 효명세자와 전혀 관련이 없을 것 같은 이곳 경주 지역 3곳에 봉표가 왜 있을까? 여기서 1km를 더 걸으면 용연폭포(龍淵瀑布)에 이르게 된다. 기림사에서는 북서쪽으로 1.5km 떨어져 있다.『삼국유사』「기이」편 ‘만파식적’조에 의하면 신문왕과 그 일행이 동해 용으로부터 받은 옥대와 만파식적을 만들 대나무를 가지고 이곳 용연에 이르러 수레를 멈추고 점심을 먹었다. 그때 태자 이공(理恭)이 대궐을 지키고 있었다. 태자는 나중에 신문왕에 이어 제32대 왕위에 오르게 되는 효소왕이다. 왕 일행이 용연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은 태자는 곧 말을 달려와서 하례하고는 옥대를 천천히 살펴보고 아뢰었다. “이 옥대(玉帶)의 여러 쪽은 모두 진짜 용입니다” 왕이 놀라 물었다. “네가 어찌 그것을 아느냐?” “쪽 하나를 떼어 물에 넣어보면 아시게 될 것입니다” 이에 옥대의 왼편 둘째 쪽을 떼어서 시냇물에 넣으니 곧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고 그 자리에 생긴 못이 용연(龍淵)이다. 그런데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태자가 태어난 것은 신문왕 7년(687)이다. 신문왕이 왕위에 오른 것이 681년이고, 이 일이 일어난 것은 신문왕 2년(682)이다. 태자 이홍이 태어나기 5년 전이다. 태어나지도 않은 태자가 이곳으로 왔다는 것이 선뜻 이해되지 않는다.장자(莊子) 내편(內篇) 소요유(逍遙遊)에 이런 구절이 있다.小知不及大知(소지불급대지)편협한 지혜는 탁트인 지혜에 미치지 못하고,小年不及大年(소년불급대년)수명이 짧은 것은 수명이 긴 것에 미치지 못한다.奚以知其然也(해이지기연야)어찌 이를 알겠는가!朝菌不知呣朔(조균부지무삭)하루살이 버섯은 한 달이 얼마나 되는지를 모르고,惠蛄不知春秋(혜고부지춘추)여름에 생겼다가 가을에 죽는 땅강아지는 1년이 얼마나 되는지를 모른다. 단지 기록만 따져 이 설화를 부정하려는 필자 자신이 어쩌면 소지(小知)이고 아니면 혜고(惠蛄)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