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취                                                                     박형준 늙은 원숭이가 무릎에 얼굴을 묻고 졸음에 빠져든다 그 옆에 활짝 피어난 모란꽃 나무를 잊고 매달려 사는 생을 잊고 자신의 냄새를 천천히 지우며 햇살 같은 털을 저녁 바람에 흩날리며 무리를 벗어나 단 한 번 땅 위에 편안하게 앉아 있다 죽음은 그렇게 온다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활짝 핀 모란꽃 옆에서 졸음에 빠져들며 자신을 잊어가는 것이다 -죽음, ‘졸음’에 빠져들어 자신마저 잊는 순간 서정을 이야기할 때 필자는 이 시를 많이 예로 든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이 시는 ‘신비한 동물의 세계’라는 방송국의 다큐프로를 보면서 썼다고 한다. 우리는 얼마나 많이 이런 프로를 봤던가. 그런데 우리는 대부분 밀림에서 원숭이가 어떻게 나무를 타고 무엇을 먹는지, 무리들의 특징은 어떤 것인지만 본다. 말하자면 우리는 한 번도 원숭이의 너머의 그 모습을 본 적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시인의 예리한 눈은 생이 머물다 간 자리를 쓰다듬는다. 시인은 죽음을 “활짝 핀 모란꽃 옆에서” 졸음에 빠져든 원숭이를 통해 본다. 세상은 바야흐로 활짝 피어나는 호시절인데도 그는 “무리를 벗어나” 홀로 졸고 있다. 이 대비는 세상의 아름다움과 무관하게 죽음은 찾아온다는 것과, 죽은 이후에도 세상은 아름다울 것이라는 선험적 인식이 있기에 가능하다. 죽음과 동행해줄 존재는 아무도 없다. 누구에게나 일생 “단 한 번” 일상에 “매달려 사는 생을 잊고/자신의 냄새를 천천히 지”워야 하는 날이 온다. 배우자와 자녀를 모아놓고 또렷한 유언을 남기고 그들 하나하나에게 자애로운 눈빛을 남기며 떠나는 생은 드라마에서나 있다. 대부분은 요양원이나 빈집에서 혼자 그 순간을 맞는다. 그리하여 이 시에서 가장 빛나는 구절은 죽음을 “졸음에 빠져들며/자신을 잊어가는 것이다”라는 서정적 인식이다. 생물학적인 죽음의 모습에서 우리는 죽어가는 주체조차도 ‘자신을 잊어’간다는 것을 확실히 인지한다. 그럼에도 걷잡을 수 없는 울음과 안타까움으로 반응하는 유족들의 모습은 자신의 삶과 고인의 삶을 심리적으로 연결시켜서 일어나는 현상일 것이다. 생에서 죽음으로 넘어가는 시간은 생각보다 장엄하지 않다. 소멸에 대한 인식을 시인은 다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하는 ‘삶의 자취’라는 시적인 모양새로 드러냈다. 원숭이는 나무에서 매달리고, 열매를 따먹고. 사랑하고 싸우는 것에서 완성되지 않는다. ‘졸음’에 빠져들어 자신마저 잊어가는 죽음까지가 바로 원숭이 삶의 ‘자취’의 전모라 할 수 있다. 이게 바로 시인 특유의 서정이다. 이렇게 시인들은 가끔 자신들만이 가진 시선을 통해 우리 생의 빈틈과 정서의 어떤 국면을 잡아낸다. 서정은 개인이 가진 가장 고유한 감성의 모양새이다. 서정은 이렇게 번지고 공유된다. 언제일까? “말간 햇살 같은 털을/저녁 바람에 흩날리”는 원숭이처럼 우리 생의 자취를 허공에 풀어놓고 참을 수 없는 졸음에 빠져들 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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