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덕천황은 죽기에 앞서 자신의 원한이 두고두고 후손들에게 전해져 중대형 황자에게 복수를 하게 해달라고 빌었다. 그런 다음 효덕천황이 병으로 사망하게 되었다. 그의 누나 황극(皇極)천황이 물러났다가 이름을 바꾸어 다시 즉위하였다. 새 이름을 제명(齊明)천황이라 했다. 효덕천황이 죽고 4년이 지났다. 그 사이 사람들은 향가 속에 담아 놓은 저주가 현실화되어 원령이 살아나지 않을까 걱정하였다. 사람들은 유간황자를 효덕천황의 좀비로 보고 끊임없이 감시하고 있었다. 걱정은 사실이 되어 유간황자가 모반을 꾸몄다는 사건이 터지고야 말았다.   658년, 제명천황과 중대형 황자가 온천에 행차한 사이 수도 아스카에 남아서 궁을 지키게 된 소아적형(蘇我赤兄)이라는 관리가 유간황자에게 접근하여 은밀히 말했다. ‘현재 천황의 정치에는 3가지 잘못이 있습니다. 창고를 지어 백성들의 재물을 거두어 쌓아둔 것이 첫째이고, 수로를 만들기 위해 나라의 양식을 낭비한 것이 둘째이며, 배로 돌을 날라다가 담을 쌓은 것이 셋째입니다’ 유간황자가 이에 대해 ‘나도 이제 군사를 일으킬 수 있는 나이가 되었지 않는가’라고 응답하였다. 유간황자가 소아적형을 믿은 것은 아마도 젊음의 성급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소아적형은 유간황자의 편이 아니었다. 그는 사람들을 동원하여 황자를 체포한 다음 천황이 가 있던 온천으로 압송해 갔다. 끌려가던 도중 유간황자는 반대(磐代)라는 언덕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그 곳에 있던 어린 소나무 두 그루를 붙잡아 서로 묶어 놓은 다음 가던 걸음을 계속했다. 고대의 샤마니즘에서 긴 실은 수명을 연장시키는 주술도구로 쓰였다. 두 그루의 소나무를 서로 묶어 둔 것은 샤마니즘의 술을 편 것이다. 중대형 황자가 끌려온 유간황자를 직접 조사하였으나 유간황자는 이를 부인하였다. 유간황자가 끌려와 조사받고 있다는 말을 들은 제명천황이 급히 향가 작품을 만들었다. 만엽집(万葉集) 10번가다. 君 之 齒 母 / 吾代 毛所 知 哉 / 磐代 乃 岡 之 草 根乎 去 來 結 手 名 “그대(유간황자)의 나이가 17살 밖에 되지 않았는데 어찌 모반을 꾸미겠는가. 내가 사람들을 대신해 중대형 황자에게 알리리. 그대가 반대(磐代) 언덕 풀숲에 가 머뭇거리지 않고 소나무 가지를 묶어 두었다는 사람들의 소문도 중대형 황자에게 알리리” 그녀는 유간황자의 고모였다. ‘유간황자 나이가 17세로서 모반을 꾸밀 나이도 아니고, 더구나 생명연장의 샤마니즘까지 시행하여 두었다고 하니 죽이면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녀가 걱정하였으나 유간황자는 용서받지 못했다. 그는 조사를 받고 돌아가던 길 중도에서 교수형에 처해지고 말았다. 이때 그의 나이 17세였다. 중대형 황자는 효덕천황이 자신을 원망하면서 향가로 만들어 놓은 저주의 내용을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효덕천황이 만들어 놓은 ‘십대나 입에서 입으로 전하라’는 원한의 장치를 끊어버리기 위해 극단적 조치를 취했다. 중대형 황자는 효덕의 향가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효덕천황의 아들을 아예 제거해 버린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도 향가의 마력을 무력화 시키지 못했다. 효덕천황이 만든 향가는 기어코 다시 살아나 훗날 일본의 역사를 바꾸는 비극적 사건을 일으키게 된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