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득한 옛날 1300여년을 거슬러 신라 사람이 되어 모차골을 찾아 길을 나선다. 모차골은 서라벌 동쪽 계곡 중에 마차가 다닐 수 있는 유일한 골짜기였다. 그래서 마차골이라 하였는데 어느 때부터인가 모차골로 바뀌고, 필자가 어린 시절에 경주 사람들은 모챗골이라고 했었다.감포행이나 양남행 시내버스를 타고 추령터널에 들어서기 전 추원(楸院) 정류장에서 내려 모차골로 접어든다. ‘楸’는 가래나무 또는 호두나무를 의미하고 ‘院’은 음식까지 제공하던 숙소를 의미한다. 원 마당에 호두나무가 있어 추원이라 했을까? 감포에서 서라벌로 오가던 길손이 날이 저물면 이곳에서 여장을 풀었을 것이다.
추원 아래 골짜기 건너에 있는 마을이 가내동이다, 옛날 사람들이 이곳에 올라 동해를 바라보고 소원을 빌었다고 하여 관해등(觀海嶝)이라고 하였다는데, 등(嶝)은 고개를 지칭하니 관해등은 ‘바다가 보이는 고개’라는 의미이다. 또, 동해를 볼 수 있는 곳이라 하여 관해동(觀海東), 바다를 볼 수 있는 곳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관해동(觀海洞)이다. 우리 경주 사람들은 가내동이라고 했는데 관해동이 발음하기 편한 가내동으로 바뀌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승용차 1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의 소로를 따라 골짜기 안으로 접어들어 30여 분을 걸어가면 오른쪽으로 인자암(仁慈庵), 그리고 정면에 ‘신문왕호국행차길’이라는 커다란 표지판이 있다. 만약 승용차를 이용한다면 이곳까지 진입이 가능하다. 여기서부터 용연폭포까지는 약 4Km이다. 골짜기에 들어서면서 보이는 안내판에는 ‘왕의 길’, 경주학연구원에서는 ‘만파식적로드’, 또는 ‘문무왕의 장례 길’이라고 하였다. 경주시청 문화관광 홈페이지에서는 ‘기림사 왕의 길’이라고 한다.
서라벌에서 동해안에 이르는 여러 길 중에 마차가 다닐 정도로 경사가 완만한 고개는 이 길뿐이다. 이 길은 문무왕의 장례 행렬이 지나면서 개척된 길로 추정된다. 이후 상기한 바와 같이 여러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을 것이다.
문무왕의 장례 행렬은 월성에서 시작해 낭산에 있는 능지탑을 거쳐 보문, 덕동호, 시부거리, 사시미기를 거쳐 모차골에서 함월산을 넘어 용연과 기림사를 지나 감은사와 대왕암에 이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길은 용성국(또는 다파나국)의 왕자였던 석탈해가 서라벌로 들어온 길이기도 하다. 쌓인 낙엽이 허벅지까지 푹푹 빠지는데 곳곳에 산짐승의 자취가 있어 등골이 써늘하다. 그러나 그 옛날 마차가 다닌 길이라 경사는 비교적 완만한 편이다. 이곳 모차골은 경주에서 가장 깊은 골짜기이다.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홀연히 백발의 신선이 나타날 것도 같다. 문득 이런 싯귀가 떠오른다.問余何事棲碧山 (문여하사서벽산)묻노니, 그대는 왜 푸른 산에 사는가笑而不答心自閑 (소이부답심자한)웃을 뿐, 답은 않고 마음이 한가롭네桃花流水杳然去 (도화유수묘연거)복사꽃 띄워 물은 아득히 흘러가나니別有天地非人間 (별유천지비인간)별천지일세, 인간 세상 아니네 시선(詩仙) 추앙되고 있는 이백(李白) 즉 이태백(李太白)의 ‘산중문답(山中問答)’이라는 시다. 이 고갯길의 정상인 수렛재까지는 1.4km이다. 말이 구를 정도로 험하다는 말구부리, 숯을 구웠던 흔적이 있는 숯가마터, 당시 이 고개를 넘던 사람들이 땀을 씻었다는 세숫방을 지나면 불령봉표에 이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