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사찰 오른쪽 계곡을 건너 대나무 터널을 통과하여 오른쪽으로 올라서는데 개 짖는 소리가 요란하다. 둘러보아도 개는 보이지 않는다. 서산대사 휴정이 어느 마을을 지날 때, 낮인데도 “꼬끼오~!”하고 닭 울음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듣고 휴정은 문득 깨달음을 얻었다. 그런데 개 짖는 소리를 듣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깨달음까지는 아니라도 황룡사지에 대한 이야기가 쉽게 풀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누군가에 이런 이야기를 하면 ‘개소리’하고 있다고 핀잔을 듣지는 않을는지?
높이 쌓아 올린 축대 위에 황룡사터에 대한 간단한 안내문과 더불어 군데군데 모아둔 석재가 시야에 들어온다. 구황동에 황룡사가 있는데 이곳에 꼭 같은 명칭의 사찰이 있다. 옛 사찰 앞에 새로 사찰을 짓고는 황룡사와 구분하기 위해서인지 안내판에는 한자는 같으나 ‘황용사’로 표기되어 있다. 불국사고금역대기(佛國寺古今歷代記)에 이곳 황룡사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옛 기록에 전하기를 신라 제27대 선덕여왕 2년(633)에 장인들을 모아 절을 세우고 약사여래상을 만들어 모셨다. 처음 황둔사(黃芚寺)라고 하였는데 제39대 소성왕 때에 5년간의 큰 가뭄이 계속되어 전국의 초목이 말랐으나 유독 이곳 골짜기만은 물이 마르지 않고 맑은 물이 계곡으로 흘러 초목은 이슬을 머금은 듯 푸르렀으므로 산의 이름을 이슬이 숨은 듯하다는 뜻으로 은점산(隱霑山)이라 했다. 그 후 조선 제16대 인조 원년(1623)에 선과(選科) 대덕(大德) 담화(曇華)스님이 조정의 명을 받아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온 후, 왜란 중 왜군으로 인해 잿더미가 된 절을 보고 비분강개하여 사찰을 재건하고 황룡사라 했다. 그 후 제19대 숙종 7년(1701)에 폐사되었으나. 스님이 남아 있어서 불국사에 합속시켜 심적암(深寂庵)이라 했다. 이후 이 암자는 1708년과 1715년에도 중창이 있었으나 폐사된 시기는 알 수 없다.
위 내용으로 미루어 창건 당시에는 황둔사였다가 임진왜란 이후에는 구황동 황룡사가 폐사되었기에 황룡사라 개칭하는데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18세기에 이르러 범우고(梵宇攷), 19세기 초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 동경잡기(東京雜記) 등과 18세기 후반 지도에서 황룡사 표기를 볼 수 있어 조선 후기까지 사찰이 이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사지에 대해서 2016년 국립공원관리사무소에서 탑지를 중심으로 시굴조사를 시행하고 2018년부터 2020년까지 불교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는데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건물터와 유물이 출토되었다. 그리고 크게 3영역에 걸쳐 건물지가 확인되고 있다. 중앙에 금당지가 있고 그 앞에 동·서로 쌍탑이 있었다. 중앙 건물지 앞으로는 회랑지가 있고, 서쪽으로는 회랑지를 비롯하여 규모가 작은 건물지도 확인이 된다. 금당지의 동쪽으로는 대형건물지가 있고 그 앞쪽에는 여러 점의 석탑재가 쌓여 있다. 그 동쪽으로 또 다른 건물지가 있다.
특히 서쪽 회랑지 구간에서 금동귀면, 금동사자, 추정 촉대 받침, 금동보당, 금동장식, 금동불상 대의편 등의 유물이 다량 출토되었다. 금동보당은 지금까지 국내에서 출토된 보당 중 가장 크다.
이 중심 건물지에서 서쪽 계곡을 건너 30여m 떨어진 위치에는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추정되는 탑재를 모아두었다. 기단 부분에 안상(眼象)이 새겨져 있는데 옥개석이 팔각이다. 일부에서는 부도일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주변에는 용도를 알 수 없는 석재들이 다량 흩어져 있다. 이곳 사지에 대해 자료가 부족하여 충분한 설명이 되지 못했다는 자책에 효봉스님의 열반송으로 마무리를 한다.
吾說一切法(오설일체법) 내가 말한 모든 법都是早騈拇(도시조병무) 그거 다 군더더기若問今日事(약문금일사) 누가 오늘 일을 묻는가月印於千江(월인어천강) 달이 일천 강에 비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