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방은 필요 없었다                                             최정례 구름이 택시를 타고 간다커다란 짐가방도 함께 싣고 간다얼마 가지 않았는데 다 왔으니내리라고 한다그러고 보니택시를 타고 있는 것은 나였다구름은 내 가방을 빼앗고는무조건 빨리 내리라고 한다비 냄새가 좋다삼나무 냄새가 시계탑 초침 소리와 섞여 있다아직 다 온 게 아니야 항의를 하려는데어느새 이 세상 말을 잊었다난 아직 마취가 풀리지 않았단 말이야소리치는데구름은 뭐라고?뭐라고?잔뜩 찌푸린 형상으로 되묻는다내 가방 내놔난 아직 마취가 풀리지 않았단 말이야소리치는데비가 쏟아진다구름이 나를 길 밖으로 던져버린다가방은 필요 없을걸 -일상 속에 파고든 죽음에의 강박 최정례는 반듯하고 무탈한 시에 제동을 걸면서 쉽게 예측이 불가능한 어떤 상황을 환상으로 돌려 새로운 의미를 끌어내는 데 능한 시인이다. 이 시 역시 저곳을 말하면서(“구름이 택시를 타고 간다”) 동시에 이곳을 말하고(“그러고 보니/택시를 타고 있는 것은 나였다”), 또 이곳과 저곳이 혼재하는(“구름은 내 가방을 빼앗고는/무조건 빨리 내리라고 한다”) 모순된 상황을 끊임없이 산출한다. 구름이 택시를 타고 있다가, 내가 타고 있다가, 나와 구름이 함께 타고 가는 상황. 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미끄러짐의 연쇄를 통해 이 시는 섞일 수 없는 것들이 하나가 되면서 주제를 흩트리는 전략을 구사한다. 여러 개로 열릴 문을 갖고 있고 실제로 그럴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그렇게 얼버무리는 것은 이 시를 대하는 합당한 태도는 아니다. 이 시는 의미의 미끄러짐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요소요소에 그 미끄러짐을 비끄러매고 응집시킬 수 있는 단초를 숨겨놓았다. 그러면 이 시가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시는 어떻게 읽을 수 있을까? 찬찬히 읽어보면 이 시는 꿈속에서 혹은 무의식의 상태에서 자신이 죽음과 대면하고 있는 상황을 알레고리로 표현하고 있다는 걸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그 때 ‘구름’, ‘비’, ‘짐가방’, ‘길’, ‘마취’, ‘이 세상 말’ 등의 대상과 관념은 물론, ‘내리라고 한다’, ‘던져버린다’ 같은 술어의 의미도 해독된다. 당겨 말하면 구름이 환상적인 요소라면 구름이 몰고 오는 비는 현실을 일깨우는 요소다. 냄새가 좋은 비는 “삼나무 냄새”를 “시계탑 초침 소리와 섞”이게 한다. 구름과 비가 교차되면서 이 시의 실감은 한층 강화된다. 택시를 타고 가던 화자에게 구름은 “얼마 가지 않았는데 다 왔으니/내리라고”, “가방을 빼앗고는/무조건 빨리 내리라고 한다”. 택시를 타고 가는 길이 일생의 알레고리라 한다면, ‘얼마 가지 않았는데’는 ‘얼마 살지 않았는데’로, “커다란 짐가방”은 현실의 욕망의 크기로 와 닿는다. 빨리 내리라는 것은 끊임없이 시달리는 죽음에 대한 강박이다. 나는 얼마 살지 않았는데, 지상의 삶을 내려놓으라는 ‘구름’에게 항의하려 하지만 나는 “어느새 이 세상 말을 잊”어버리고, 삶의 애착을 깨트리지도 못했다고(“난 아직 마취가 풀리지 않았단 말이야”) 아무리 소리쳐도 “뭐라고?뭐라고?” “잔뜩 찌푸린 형상”의 되물음만 들을 뿐이다. 이 강박은 마침내 내가 “길밖으로 던져지”며 “가방은 필요 없을걸”, 자신을 밀어내는 구름의 조롱을 듣고 쏟아지는 비를 맞는 환상으로 이어진다. 이 시는 시인이 무의식 속에서 죽음과 대면하다 깨어나곤 하는 과정을 그린다. 멜랑꼴리가 아니라도 우리는 삶에서 이런 죽음에의 예감에 사로잡히고 깨어나고 한다. 실제 이런 과정을 거치는 가운데 시인은 지난 해 갑작스럽게 우리 곁을 떠났을까? 수년 전의 창작이라고 하지만 시인이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며 쓴 시로 읽히는 이유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