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만큼 원사정재(院祠亭齋)의 고건축물이 많은 곳이 드물다. 현존하는 건축물도 상당하지만 허물어져 기록으로만 전하는 것들까지 감안하면 거의 경주시 전역에 가득하였을 것으로 판단되며, 건축물의 수만큼 인물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도 병행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경주시 강동면 단구리에는 경주이씨 이세기(李世基)를 주벽(主壁)으로, 좌우에 국당(菊堂) 이천(李蒨,1274~1349)과 송와(松窩) 이종윤(李從允,1431~1494)을 배향하는 단구서원(丹邱書院)이 있다. 유림과 문중의 공의로 1862년에 이종윤을 제향하는 모현서당(慕賢書堂)으로 건립되었다가 훼철되었고, 이후 1926년에 새롭게 지었으며, 1983년에 중창하였다.
『안씨가훈(顔氏家訓)』「모현(慕賢)」을 보면, “천 년에 성인(聖人) 한 분이 나와도 마치 아침저녁 사이 같고, 오백 년에 현인(賢人) 한 분이 나와도 마치 어깨를 나란히 하여 연이어 나오는 것 같다”라 하였다. 이는 성현을 만나기가 어렵고 뜸하기가 이와 같다는 말이다. 만약 세상에서 보기 힘든 뛰어난 인물을 만나게 된다면 어찌 그를 따르며 흠모하지 않겠는가? 이에 어진 이를 사모하는 마음에서 ‘慕賢’의 이름을 빌어 선조의 덕을 숭모하는 공간의 명칭으로 삼은 곳이 많다.
배향인물을 살펴보면, 이세기는 고려 충렬왕 때의 문신으로, 이천의 부친이다. 이천은 1299년에 국자감시(國子監試)에 급제하였고, 첨의평리상의(僉議評理商議)로 원나라에 가서 교사(郊赦)를 축하하고 돌아왔으며, 우사보(右思補)·동지공거·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등을 역임하였다.
이종윤(李從允,1431~1494)은 1462년 생원·진사에 합격하였고, 1468년 문과에 급제하여 영창전참봉(永昌殿參奉)을 거쳐 예빈시경력(禮賓寺經歷)에 제수되었다. 이후 내자시주부(內資寺主簿)·예조좌랑·제용감첨정(濟用監僉正)·사옹원부정(司饔院副正)·시강원보덕(侍講院輔德)·사헌부장령 등을 역임하였고, 1490년 여름에 제주목사로 부임해 백성의 칭송을 얻었다. 서애 유성룡은 「무오당적(戊午黨籍)」에서, “남계(藍溪) 표연말(表沿沫,1449~1498)과 교유한 이는 모두 한 시대의 유명한 선비이다(所與交遊 皆一時名士)”며 이종윤의 인물됨을 간접적으로 피력하였고, 남계는 김종직의 문인으로 1498년 무오사화에 화를 당하였지만, 이세윤은 이미 1494년에 세상을 떠나 연좌의 화를 면하였다.
단구리에 세운 단구서원은 이미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사당(祠堂)을 1926년에 새로이 서당(書堂)으로 고쳐 편액하였고, 이종윤의 행장을 지은 지역학자 손제익(孫濟翼)선생이 그 기문 등을 남긴 것으로 보인다.
-모현사서당기(慕賢祠書堂記) 모현서당(慕賢書堂)은 목사(牧使)를 지낸 송와(松窩) 선생 이종윤(李從允) 공을 배향하는 곳으로, 예전에는 모현사(慕賢祠)였다. 무릇 선조의 덕스러움을 설명할 수 있고, 업적을 베풀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세대의 멀어짐과 자손의 마땅함에 달려있다.
제사를 지낸 것은 철종 계해년(1863)으로, 공의 남은 후손들이 비로소 새로운 사당을 지었다. 은혜에 보답하는 제사를 지내며 비록 사사로이 배향하였으나, 의론을 내어 온 마을의 선비들이 빠르게 도왔었다. 하지만 고종 무진년(1868)에 나라에서 금하는 일을 당해 훼철되어 남은 빈터는 황폐해졌고, 다스리지 못한 지가 58년이나 오래되었다.
후손들이 그 옛터를 지나며 풀만 무성함을 견디지 못하고, 개미가 썩은 고기에 모이듯 더욱 절실하였으니, 향의에 따라 사당 터에 한 칸의 집을 건축하였다. 비로소 을축년(1925) 봄에 시작해 정묘년(1926) 가을에 공사를 마쳤고, 이미 모현서당(모현사(慕賢書堂)이라 편액하였다.
나에게 기문을 부탁하였으나, 나는 늙고 글이 부족하여 어찌 어진 자를 사모하는 뜻을 다 말하겠는가. 살펴보면 보덕공(輔德公:이종윤)의 어진 행적은 남계 표연말 선생이 지은 묘갈문에 이미 후사를 징험하기에 충분하고, 약남(藥南) 이헌락(李憲洛,1718~1791)의 유사와 정헌(定軒) 이종상(李鍾祥,1799~1870)의 훌륭한 가장(家狀)은 드러냄에 부족함이 없다. 그가 조정에 있을 때의 큰 절개와 어진 정치가 저들과 같고, 그 어짊은 마땅히 후세의 사모하는 마음 끝이 없도다.
다만 예전에는 모현사(慕賢祠)였다가 지금은 모현당(慕賢堂)이 되었고, 은혜에 보답해 제사지내는 예는 당(堂)이 사(祠)만 못하지만, 어짊을 사모하는 마음이 어찌 사와 당으로 간격을 두겠는가? … 그 사모하는 자가 다만 사모함에 그치지 않을 따름이니 힘쓰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