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Ludwig van Beethoven/1770-1827)에게 음악적 재능이 있음을 발견하고는 너무나 가혹하게 피아노 연습을 시켰다. 거의 학대나 마찬가지인 가르침 때문에 어린 베토벤의 성격은 점점 삐뚤어져 갔다. 훗날 베토벤이 괴팍한 성격을 갖게 된 건 아무래도 아버지의 영향이 큰 듯하다. 베토벤은 모차르트처럼 신동으로 인정받진 못했지만, 그래도 청년 베토벤의 음악은 점점 깊이를 더해 갔다. 늘 취해있어 가장 노릇을 못했던 아버지는 베토벤 나이 22세(1792년)에 죽고 만다. 청년 베토벤은 또래 음악가들 사이에 제법 잘 나가는 피아노 연주자였다. 작곡도 곧 잘 했다. 고전파의 대선배인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영향력이 베토벤의 초기작품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이젠 꽃길만 걸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이다. 아직 창창한 20대에 귀가 먹다니! 청천병력도 유분수지. 베토벤은 빈(Wien) 인근 휴양지인 하일리겐슈타트(Heiligenstad)에서 유서를 쓴다. 그이 나이 32세(1802년) 때다. 나와 함께 있는 사람은 멀리서 들려오는 플루트 소리를 들을 수 있는데도 나에게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다른 사람에게는 들리는 목동의 노래 소리 또한 나는 전혀 들을 수 없었다. 그럴 때면 나는 절망의 심연으로 굴러 떨어져 죽고 싶다는 생각 밖에 나지 않는다. 그런 생각에서 나를 구해준 것은 예술, 오직 예술뿐이다. 유서의 한 구절이다. 읽어 보면 베토벤의 참담한 심정에 정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정말 죽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마음을 다잡아 준건 다름 아닌 예술이었음을 고백하고 있다. 음악을 할 수 없어 죽고 싶었지만, 죽고 싶은 마음을 다시 돌려놓은 것도 결국 음악이었다. 이런 아이러니가 있을 수 있는가! 하일리겐슈타트 유서는 베토벤의 생전에 공개되지는 않았다. 결국 그는 죽지 않고 살아서 불멸의 작품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유서를 전후하여 그의 음악은 큰 변화를 겪는다. 유서 전에 보이던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색깔이 가시고, 베토벤 특유의 색깔을 내기 시작한 것이다. 대표적인 작품이 교향곡 3번 영웅(1803년)이다. 영웅에는 모차르트의 달달함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교향곡이라는 그릇에 전에 없던 웅장함을 채워 넣었다. 삶과 죽음 사이에서의 번민은 전혀 새로운 음악적 패러다임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이어서 교향곡 5번 운명(1808년),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1809년)가 뒤를 이었다. 음악적 혁명이었고, 베토벤은 다시 태어난 것이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