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학산·자옥산·도덕산·화개산 골 깊은 산새가 병풍처럼 둘러쳐 안온한 옥산서원이다. 물소리 바람소리, 나뭇가지 진을 치는 새소리 맑은 기운에 세월 덧 될수록 운치가 묻어난다. 일생을 성리학에 뜻을 펼쳐 영남학파의 학맥을 잇고, 격동기의 순간마저 덕망으로 살았던 문원공 회재 이언적. 동방 5현으로 불천위문묘에 배향되기까지 인(仁)의 학문으로 다스린 삶의 행장은 치열하고 관대하다. 성리학을 완성시킨 퇴계 이황, 율곡 이이도 생전에 뵙지 못한 회재 선생의 저서를 스승삼아 더 높고 넓고 깊게 정진했다. 그 당시 시대배경의 인간적 감동이 설화처럼 전해지는 신도비 이야기 내막은 가슴 뭉클하다. 경주부윤 동악 이안눌(李安訥 1571~1637)은 회재 선생을 양재역벽서사건에 모함시켜 귀양살이 시킨 이기가 증조부다. 이안눌은 평소 증조부의 과오를 부끄럽게 여기던 중 경주부윤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회재선생의 위패가 모셔진 옥산서원을 참배하려 죄진 마음으로 서원 길목에 이르니 회재 후손들이 길을 막았다. 이안눌은 수레에서 맨발로 걸어 나와 증조부가 범한 잘못을 머리 숙여 눈물로 용서를 빌었다. 이에 감동한 회재 후손들은 길을 열어주었다. 옥산서원 역락문 앞 용추바위 위에 고봉 기대승이 지은 신도비명 중에, 이기가 회재선생을 모함한 죄는 용서받지 못한다고 적혀있었다. 이안눌이 못 보게 천으로 덮어 씌웠는데, 비문을 보여 달라 간청하자 천을 벗겼다. 비문을 읽어가던 이안눌은 그만 신도비를 붙들고 통곡하였다. 선조에 관한 내용만 지워줄 수 있다면 자신의 이름을 옥산서원 노비안(奴婢案)에 올려도 사양하지 않겠다고 간청했다. 보는 이로 하여금 감동을 자아내, 원하는 그 내용을 지운 흔적이 어렴풋하다. 신도비는 오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읽히는데 목적을 두지만, 이안눌의 진심어린 호소에 서원 안으로 옮겼다. 경주부윤인 이안눌은 옥산서원과 회재선생 고택을 수리하는데 필요한 비용을 아낌없이 지원하였다 한다. 옥산서원 너럭바위 자계천 외나무다리 밟고 가는 독락당(獨樂堂) 봄빛 수더분하다. 벌써 봄을 타는지 가슴으로 달겨드는 봄바람에 안기는 길섶이다. 옥산서원 강학공간에서 700m 거리에 터를 이룬 독락당, 세속의 관직에서 물러나 고독의 쉼을 즐겼던 살림집 사랑채이다. 중종(中宗)과 사돈이 되는 김안로의 중용(重用)의 부당함을 반대하다가 모함으로 파직된 후 별장과 서재로 거처했다. 어느 누구에게도 영혼을 방해받지 않고 홀로 학문과 자연을 품었던 천상의 가옥이다. 꿈꾸는 시인이 꿈꾸는 소담스런 옛 집 대청마루에 앉아, 한참을 말갛게 넋을 놓아본다. 자계천 담장 쪽으로 살창을 달아 대청에서 홀로 즐기는 유유히 흐르는 물의 이치를 삶의 철학으로 승화시켰을 풍류가 은근하다. 독락당에 딸린 관어대(觀魚臺) 반석위에 절경인 계정(溪亭)은 한석봉이 쓴 현판이다. 논어의 인자요산(仁者樂山) 지자요수(知者樂水)에서 취한 글귀다. 선생이 갈구하던 인(仁)의 근본을 우주의 자연이치와 인간의 심성을 관조성찰 하면서 성리학에 침잠해갔을 공간이다. 계곡의 물소리 바람소리에 치유되어 승화되는 도학(道學)의 경지가 삶의 철학으로 지펴지는 정자다. 소박함 속에 품격이 도드라진 멋진 터전에 봄 햇살 가득하다. 회재 선생은 41세(1531년)에 귀향해 독락당(獨樂堂) 집을 짓고, 자연을 벗 삼아 유학의 심오한 이론을 연구 발전시켜 나아갔다.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을 맡고, 낙향했다가 다시 복직되는 굴곡의 삶을 학문으로 평정했다. 시냇가에 운치가 깃던 소박한 집을 짓고 굳건히 공부하며 제자들을 가르쳤다. 자연과 일치되어 유학의 핵심개념 중의 하나인 태극(太極) 학설 논쟁을 펼쳤다. 47세(1537년)에 다시 관직에 나아갔다. 중종 임금에게 옳은 정치를 열 가지 덕목 “일강십목소(一綱十目疏)” 상소문을 올렸다. “군주의 마음이 바르면 만사가 다스려진다.”는 뜻이다. 유교사상의 철학적 학문, 위기지학과 수기치인 정신을 표현한 문장이다. 이언적은 성균관 대사성, 사헌부 대사헌 등 고위 공직을 역임했다. 1547년 을사사화 때 파직을 당하여 억울하게도 평안도 강계로 유배를 당했다. 녹록하지 않는 척박한 환경에서도 학문의 기백을 곧추세웠다. 『구인록(求仁錄)』 책을 저술했고 유교의 성리학 학술을 심도 있게 다졌다. 63세 귀양지에서 운명을 달리했다. 무잠계면 무회재(無潛溪 無晦齋) 회재의 혈손 이전인(李全仁1516~1568) 호이다. 일생을 인(仁)을 구하던 회재선생의 뜻이 아들 이름에도 새겨져있다.효자아들 잠계공은 유배지 평안도 강계에서 임종한 시신을 수습하여 수 천리 빙판길을 눈물로 운구했다. 동상으로 피폐된 몸을 가누며 부친의 정신이 스민 유품들을 고스란히 모셔왔다. 아버지의 유서와 자신이 쓴 친서로 죄인으로 모함된 부당함을 증명하였다. 지극정성 학덕과 효심은 부친의 사후 명예를 존귀하게 회복시켰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