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궁과 월지’는 얼마 전까지 안압지(雁鴨池)로 불렸다. 신라의 성대함을 간직한 안압지는 뭇새가 날아드는 적막한 연못과 무너진 건물로 쇠잔한 기운을 머금으며, 오랜 세월을 견뎌왔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안압지는 천주사(天柱寺) 북쪽에 있다. 문무왕이 궁궐 안에 못을 파고 돌을 쌓아 산을 만들었는데 무산십이봉(巫山十二峯)을 본떴으며, 화초를 심고 진기한 새들을 길렀다. 그 서쪽에 임해전(臨海殿) 터가 있는데, 주춧돌과 섬돌이 아직도 밭이랑 사이에 남아 있다”고 전한다. 임해전은 신라 시대의 궁전으로 건립연대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삼국사기』를 보면, 신라의 국운이 이미 기울어진 931년(경순왕 5)에 임해전에서 신라왕이 고려태조를 맞아 연회를 베풀었다고 하였으니, 신라의 흥망을 기억하는 임해전은 신라의 수많은 기억을 간직한 공간으로 인식된다. 옛 사람들은 높은 곳에 대와 정자 등을 짓고서 자연과 더불어 풍류를 즐겼다. 또한 상서롭고 나쁜 기운을 관망하여 기미를 살폈고, 백성과 함께 노닐며 수고로움과 편안함을 조절하는 방도로 삼았다. 특히 문왕은 영대(靈臺)를 지었는데, 백성들은 마음이 즐거워 자식이 부모의 일에 달려오듯이 애써 부르지 않아도 스스로 찾아왔으니, 이것이 바로 덕치의 표본이었다. 임해정은 안압지 동쪽에 있었던 정자로 1926년 경주군수 박광렬(朴光烈)이 경주의 풍광을 즐기기 위해 안압지 주변에 정자를 건립하였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1977년에 경주시장 최태진(재임1976.02.26.~1978.08.02)과 경주시궁도협회의 주도로 임해정을 황성공원으로 옮겨 활 쏘는 호림정(虎林亭)으로 고쳐 걸었다. 김해출신 소눌(小訥) 노상직(盧相稷,1855~1931) 은 경주의 안압지를 찾아 최근에 세워진 임해정에 올라 풍광을 즐기고 박광렬의 시에 “이름난 도읍에 좋은 누각이 없어 안타까웠는데 아득한 천년 안압지 가에 마침 어진 부윤이 새롭게 지어 지나간 성대한 시대를 이었네(名都曾歎乏名樓 千載寥寥鴈鴨頭 適値賢矦修擧日 緬追前代盛繁秋)”라며 차운하였다. 노상직은 김해 생림면 금곡리에서 태어났으며, 김해 부사인 성재(性齋) 허전(許傳,1797~1886)에게 글을 배웠다. 동학이 일어나자 1895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금곡에 금산서당(錦山書堂)을 건립하고, 이듬해 노곡(蘆谷)으로 옮겨 자암초려(紫巖草廬)를 짓고 후학을 양성하였다. 문화재 도시 경주는 독특한 문화환경과 오랜 역사를 지닌 특수한 공간이다. 특히 신라의 문화가 지배적인 이곳에서 조선문화의 산물인 누각정대(樓閣亭臺)는 시대공존의 문물로 인식되어 영구히 보존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임해정기(臨海亭記) - 노상직 누각(樓閣)과 정자(亭子)와 대(臺)의 설치는 풍광(風光)을 보기 위함이요, 손님과 즐기기 위함이다. 게다가 시대의 흥망성쇠를 또한 볼 수 있는데, 황제는 12루를 짓고서 신명(神明)의 사람을 구하였고, 문왕은 영대(靈臺)를 경영하고서 백성들이 자식처럼 찾아왔다. 반면에 초나라는 장화대(章華臺)를 쌓고서 제후가 이르지 않았고, 오나라는 고소대(姑蘇臺)를 쌓고서 갑자기 고라니와 사슴이 나타났었다. 우리 땅에 있는 300칸의 청류각(淸流閣)과 500길[장(丈)]의 흘산정(紇山亭)은 모두 한 때 빼어났으나 성쇠의 기미가 남아있다. 신라는 잘 다스려졌기에 정자를 지어 경영할 마음이 없었다. 그러나 포석정의 유상곡수와 금오산의 구성대(九聖臺)는 빼어나 태평성대의 명승지가 되었지만, 시든 꽃과 무성한 풀만 부질없이 유람객을 배회하게 할 따름이었다. 박광렬 군수가 동도를 다스린 지 8년에 은혜를 베풀어 만들고, 또 무너진 곳을 보수하였다. 지난해는 집경전을 보수하며, 선왕의 성대한 뜻을 잊지 않았다. 이때 옛 수도의 이름난 자취가 많이 발견되었다. … 객사는 낮고 좁아 어찌할 수 없음을 늘 안타깝게 여겨 안압지 가 임해전 옛터 곁에다가 정자를 지었다. 임해전의 완성은 신라 중흥의 사이에 있었다. … 조정은 위에서 화하고, 백성은 아래에서 편안하였으니, 우리나라가 생긴 이래로 이와 같은 성대한 때는 없었다. 진실로 이름난 자취를 보고자하다면 이 임해전을 빼고서 어찌 가능하리오. 임해정이라 편액하였으니 신라의 성대함을 알 수 있다. 진기한 새와 꽃의 가득함이 비록 옛적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12봉의 청류(淸流)는 다함이 없고, 난간에 기대어 바라보면 문득 무산(巫山)과 동정(洞庭) 사이에 내가 있는 듯하였다. 불국사와 분황사의 경계가 서로 접하고, 옥적과 금척의 영이(靈異)함을 보는 듯 … 모두가 시야에 들어왔다. 하물며 대중에게 물어 돈을 모으고, 백성들이 공사 돕기를 수고로이 여기지 않았다. 군수가 나에게 기문을 부탁하였다. 나와 군수는 비록 서로 만나지는 못하였지만 미수(眉叟) 허목(許穆,1595~1682)·성호(星湖) 이익(李瀷,1681~1763)·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1712~1791)·하려(下廬) 황덕길(黃德吉,1750~1827)의 문하에 있으며 나아가 서로 같음을 구하였기에 나는 끝내 사양하였다. 아! 동도는 우리 영남의 매우 가까운 곳이다. 위로는 세 성씨가 서로 전하고, 천년의 기틀을 공고히 이뤘으며, 아래로는 홍유 설총·문창 최치원·익재 이제현·회재 이언적 여러 선생이 도덕 문장으로 후인을 깨우쳤다. 정자에 오를 날을 청하여 서악서원과 구강서원과 옥산서원을 바라보니 사모함이 일었다. 고을의 선비들과 남은 일을 차례대로 밝혀 나가야하는 이유를 도모한다면, 또한 사문(斯文)의 성대함을 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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