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스님의 ‘산방한담’에 이런 구절이 있다. “산에서 듣는 바람 소리는 귓전만을 스치는 것이 아니다. 저 뼈 속에 묻은 먼지까지도, 핏줄에 섞인 티끌까지도 맑게 씻어 주는 것 같다. 산바람 소리는 갓 비질을 하고난 뜰처럼 우리들 마음 속을 차분하고 정결하게 가라앉혀 준다. 인간의 도시에서 묻은 온갖 오염을 씻어준다” 가끔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산을 찾는다. 특히 이곳 무장봉에 들어서면 늘 법정스님의 이 글이 생각난다. 무장사지는 위와 아래로 단을 이루고 있는데 윗단에는 사적비가 있고 그 아래는 미타전 터로 알려져 있다. 아래 단의 끝자락에 삼층석탑이 있다. 현재 이곳에는 미타상을 조성한 인연을 적은 무장사아미타불조상사적비의 이수 및 귀부와 숲 사이에 있는 삼층석탑이 이곳이 옛 절터임을 일깨워주고 있다. 현재 보물로 지정된 아미타조상사적비는 비신은 없어지고 다만 비를 받혔던 쌍귀부와 비신 위에 올렸던 이수만이 남아 있었다. 경주 지역에 있는 비신의 귀부는 태종무열왕릉을 비롯하여 13기가 전해지고 있다. 사지에는 6기가 있는데, 그중 이곳 무장사지를 비롯하여 숭복사지, 창림사지, 포항 신광면의 법광사지에는 쌍귀부가 있다. 귀두(龜頭)는 절단되어 없어졌으며, 귀부 비좌 위쪽 4면에는 전면과 후면에 각각 4구, 좌우 측면에 2구씩 12지신상이 조각되어 있다. 이러한 형식은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형태이다. 또 지금까지 사찰이나 왕릉에서 귀부의 방향이 남향이나 여기서는 서향이고, 자상(子像)의 경우 북쪽을 향해야 하는데 동향을 하고 있다. 따라서 귀부의 방향을 남향으로 바로 잡아야 하는 것 아니냐는 주장이 있다. 비좌의 귀두는 모두 파손되어 유실되었는데 2008년 비신 복원을 위한 조사를 시행하던 중 서쪽으로 약 30m 떨어진 계곡에서 파손이 심한 왼쪽 두상을 발견하여 이를 복원하였다. 학계에서는 이 귀두는 용머리로 변모해 가는 과정으로 학술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비신 위에 얹혀진 이수는 6마리의 용이 구름 속에서 용틀임을 하면서 앞발로 여의주를 움켜잡고 있는 모습이다. 행방이 묘연했던 이 비가 다시 빛을 보게 된 것은 조선 정조 때의 대학자인 이계 홍양호(1724-1802년)에 의해서이다. 그가 경주 부윤을 지낼 때였다. 마을 사람이 맷돌로 콩을 갈고 있는데 유심히 살펴보니 그 맷돌은 평범한 돌이 아닌 비석의 파편이었다. 이미 마멸이 심해 알아보기 어려웠으나 이전에 비문 전부를 탁본한 사람이 있어 무장사지 비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비에 새겨진 글씨는 김생 글씨라고도 하고 왕희지 글의 집자라고도 하는데, 일찍이 금석학자이기도 한 추사도 빼어난 글씨라 높이 평가한 바 있다. 그가 1817년 직접 이곳을 찾았을 때 비편을 새로 발견하고 사찰 뒤로 옮겼다고 한 내용이 있어 19세기 초반 이후에 폐사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15년 비편 가운데 세 조각이 발견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현재 확인 가능한 일부 글자를 새겨 비신을 보완하였으나 이수 및 귀부와는 석재의 차이가 두드러져 어색하다. 절터 아랫단 끝자락에는 역시 보물로 지정된 무장사지 삼층석탑이 있다. 이중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탑으로 적정한 비례와 균형이 잘 잡힌 당당한 모습으로 통일기 전형적인 신라 석탑이다. 아래층 기단 사면으로는 모서리기둥[우주(隅柱)]과 버팀기둥[탱주(撑柱)] 2주를 새기고 그 위 1층 몸돌에는 각 면마다 안상을 2개씩 조각하였다. 이처럼 기단에 안상을 새긴 예로는 현재 국립경주박물관 입구 왼쪽 높은 곳으로 옮긴 남산 승소곡 삼층석탑에서도 볼 수 있다. 각 층의 탑신석과 옥개석은 각각 1매씩 모두 6매로 구성되어 있다. 1층 몸돌 중앙에는 큼직한 네모 모양의 사리공이 있다. 지붕돌 아래로는 층급받침이 5단이고 처마선은 직선을 이루다가 양 끝에 살짝 들려있다. 각층 옥개석 위에는 각형의 2단 탑신 받침이 있다. 옥개석의 네 모서리에는 풍령(風鈴) 등 장식을 달았던 작은 구멍이 각 변마다 2개씩 뚫려있다. 무너진 채로 방치되어 있던 이 탑의 잃어버린 석재를 보충하여 1963년 복원하고 다시 1996년 전면 해체 보수하였다. 상륜부의 노반과 복발은 새로운 석재로 보완하였다. 이 탑은 9세기 이후에 건립된 것으로 학계에서는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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