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배우 오영수가 골든글로브상을 수상했다. 넷플릭스 드라마〈오징어 게임〉으로 수상했으니 벌써 작년 일이다. 상 이름이 우리말로 황금 장갑이니까 복싱이나 야구 협회 정도를 떠올리기 십상이지만 명백한 오해다. 1944년부터니까 올해로 79회째 접어드는 골든글로브(Golden Gloves)는 미국을 대표하는 3대 시상식 중 하나다. 할리우드 외신기자협회(Hollywood Foreign Press Association) 회원(현재 87명)이 영화와 텔레비전 프로그램 부문으로 나눠 선정하는, 권위 있는 시상식에서 그는 한국인 최초로 남우조연상을 거머쥔 것이다. 기분이 어떤지 기자가 물었다. “전화통에 불이 나 정신이 없다. 지금 그로기 상태다” 여기까지는 익히 예상한 대로다. 겸손이 미덕인 우리 문화권에서 기대되는 모범 답안이다. 그러면서 “차라리 전화를 안 받고 가만히 있는 편이 나을 것 같다”고 고백했다. 어? 이런 반응은 좀 예상치 못했다. 그는 말을 이어갔다. “<오징어 게임> 이후 내 이름이 여기저기 보일 때는 들떠서 중심이 흩어질까 봐 걱정을 했다” 이제 이해가 간다. 그의 말에 엄살이 아닌 진심이 느껴진다. 명성(fame)을 오히려 ‘들뜸’으로 정의하다니, 내가 아는 그 단어 맞나 싶어 사전을 찾아봤다. ‘정신 의학에서 비정상적이거나 보통이 아닌 흥분된 상태’라고 정의했다. 들뜸이란 단어로 그가 환기하고 싶었던 것은 이어서 언급한 ‘중심’일 테다. 그는 공중에 붕~ 떠있는 것보다 땅에 발을 단단히 디디고 서있는 걸 원했다. 노배우는 실제 행동으로 보여줬다. 쇄도하는 인터뷰 요청을 거절하고 그는 대학로 연극판으로 돌아왔다. 지난 12월 개막한 라스트 세션(Last Session)에서 그는 프로이트 박사를 연기 중이다. “니들이 게 맛을 알아?”로 유명한 원로 배우 신구와 더블 캐스팅으로. 영국이 독일에 전면전을 선포한 세계 2차 대전이 막 시작한 즈음, 심리학자이며 위대한 지성인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와 영문학자이며 소설가인 C.S. 루이스가 신(神)의 존재를 두고 논쟁을 벌이는 내용이다. 그럼 왜 하필 프로이트 역할일까? 스님 전문(?) 배우로 알려져 있지만 무신론자라고 밝힌 그는 극 중 프로이트처럼 신(神)을 부정했다. 인간의 외부지향적 본능이 가닿을 수 있는 그 정점인 신(神)을 부정하는 것도 그만큼 인간 중심에 집중하려는 그의 인터뷰와 맥을 같이한다면 과한 해석일까. 그는 인터뷰에서 “평심을 되찾아 본래 내가 지향하던 내 모습으로 돌아왔다”고 고백했다. 그 속에 배우의 단단한 중심이 만져진다. “첫 공연은 힘들었지만 이 연극을 하길 잘했다고 생각한다”는 말은 그가 발 디디고 있는 데가 그의 마음 한가운데임을 짐작할 수 있다. 명성과 들뜸의 그 비실체성을 잘 알고 있는 눈치며 거기서 파생된 편안함이다. 오징어 게임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는 듯 그는 “앞으로도 연극을 중심으로 영화나 방송도 할 계획이다”고 했다. 문득 외연(外延)의 확대란 중심자리를 놓치지 않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사실을 그의 삶으로 보여주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무대 위에서나 아래에서나 한결같은 거인의 모습이 참 보기 좋다. 어쩌면 현대인들에게 가장 어려운 게 바로 이 ‘중심잡기’ 아닐까 싶다. 요즘처럼 혁신이다 새로움이다 죄다 외연 확장에 골몰하는 사이 노배우는 중심을 더욱 두텁게 채우고 있으니 말이다. 70대(代)가 되어서야 찾아온 행운을 쫓아가지 않고 지금껏 해온 것을 정성껏 지켜나가는 모습에서 대가(大家)의 풍모를 느낄 수 있다. 인터뷰 말미에 그는 “세계 속의 내가 아니라 나 속의 세계”라고 했다. 자신의 자리를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불교에서는 주인공(主人公)이라는 용어를 빌어 강조했다. 과연 우리는 우리 삶의 주인공일까? 와이셔츠에 커피 좀 쏟았다고 나를 완전히 잊어버렸다. 지나가는 예쁜 여인 힐끔거리느라 내 고민거리를 잊은 지 오래다. 나를 내 삶의 주변인으로 만드는 것만큼 단호하고 무서운 운명은 없다. 배우 오영수는 자기 삶에 주인공으로 되돌아왔다. 아니 늘 그랬던 것처럼 그는 그 자신을 지켜온 것이다. 그에게 황금으로 된 장갑은 그래서 전혀 새롭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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