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이씨 지헌(止軒) 이철명(李哲明,1477~1523)은 자신의 호 ‘그칠 지(止)’처럼 매사에 분수를 지켜 만족하여 그칠 줄 아는 실천적 학자의 삶을 살았다. 지위가 낮은 벼슬살이를 하면서 한결같은 마음으로 나랏일을 근심하고 임금을 사랑하여 충성으로 섬기는데 그칠 따름이었고, 모친 초상에 여막을 짓고 효도를 다하는데 그쳤으며, 사화를 당해 벼슬에 미련을 두지 않고 편안하게 여기는데 그쳤으니, 지족(知足)을 실천한 인물이었다.
지헌 선생은 고려조 여주지방 호족 이세정(李世貞)의 후손으로, 고조부 이광호(李光浩) - 증조부 이극량(李克良) - 조부 이구성(李九成)의 가계를 이루며, 부친 이계손(李係孫)과 모친 의인양씨 사이에서 경주부 북쪽 천상촌(川上村)에서 태어났다.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1491~1553)과는 5종 형제관계로 선대(先代) 이윤방(李允芳)의 아들 장자 이지언과 차자 이춘언에서 분파되었다. 특히 부인은 풍덕류씨 류복하(柳復河)의 따님으로, 류복하는 송재(松齋) 손소(孫昭,1433~1484)의 장인으로 양좌동의 형성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는 인물이다.
지헌은 1495년 진사에 합격하고, 1504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저작랑(著作郞)·홍문관박사·예조정랑·홍문관검교 등을 역임하였으나, 중종 14년(1519)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충암(冲菴) 김정(金淨)·동천(東泉) 김식(金湜) 등 신진사류가 남곤(南袞)·심정(沈貞)·홍경주(洪景舟) 등 훈구 재상에 의해 화를 입는 기묘사화가 발발하자 기미를 알아차리고 귀향하였다. 이후 부모봉양과 학문궁구에 매진하였는데, 이때 지은 「귀향부(歸鄕賦)」가 탁한 세상에 대한 그의 마음을 대변한다. 1900년에 포암(逋庵) 권주욱(權周郁,1825~1901)이 지은 행장을 보면, “선생이 돌아가신지 300여년이 되고, 문헌이 많지 않아 당시의 일을 상고할 수가 없으나, 현재 보존되어 있는 것으로 미뤄보면, 그것으로도 은미한 영향 그리고 후세에 끼친 학문을 닦는 법과 풍습으로 삼기에 충분하다.”라 하였으니, 세월의 멀어짐과 자료의 소략함이 아쉬울 따름이다.
강동면에 위치한 귀래정(歸來亭)은 1755년 천서문중에서 건립되었고, 이후 1798년 후손인 이지한(李之翰)을 거쳐 1938년 문중의 논의를 통해 선조숭모사업의 일환으로 도연명의 귀거래사에서 뜻을 취해서 ‘육화정(六花亭)’에서 ‘귀래정’이라 하였으며, 춘사(春沙) 이병관(李炳觀,1858~1949)과 후손 이대원(李大源)의 「귀래정기」가 전한다.
세산(洗山) 유지호(柳止鎬,1825~1904)와 민병한(閔丙漢,1861~?)이 「묘지명 병서(幷序)」를, 방산(舫山) 허훈(許薰,1836~1907)이 지헌 이공 묘표(止軒李公墓表), 만구(晩求) 이종기(李種杞,1837~1902)가 병조좌랑 지헌 이공 묘갈명 병서(兵曹佐郞止軒李公墓碣銘 幷序) 등을 지어 지헌 선생의 내력을 전승하였지만, 선생에 대한 자료가 소략해 인물을 연구하기에 한계가 있다. 다만 이종기는 묘갈명에서 중국의 남전(藍田)에서 향약(鄕約)을 실행한 여씨(呂氏) 여대충(呂大忠)·여대방(呂大防)·여대균(呂大勻)·여대림(呂大臨) 4형제와 남송의 학자 서산(西山) 채원정(蔡元定,1135~1198)과 그의 아들 구봉(九峯) 채침(蔡沈,1167~1230) 부자 모두 주자(朱子)를 스승으로 섬긴 채씨 부자를 언급하면서 회재와 지헌의 돈독한 관계를 이끌어내려고 하였다. 특히 14살의 터울의 회재와 지헌은 기묘사화를 중심으로 경주로 돌아오는데, 회재는 조부상을 당해 화를 면하였고, 독락당을 짓고 학문에 궁구하였으며, 지헌은 사화를 피해 고향으로 돌아와 본분을 지키며 살았으니, 1519년부터 1523년 사이 이들의 만남이 사뭇 궁금해진다. -병조좌랑 지헌 이공 묘갈명 병서 - 만구 이종기 문원공 회재 이 선생이 조정에서 일어나 천년의 끊어진 학문을 이었고, 생각건대 앞서거니 뒤서거니 남전(藍田)의 여씨와 남송(南宋)의 채씨처럼 일어난 자가 있지만, 명성이 없음은 어째서인가? 지헌 이 공은 회재 선생의 족형제이다. 덕행과 사업과 문장이 모이면 단산(丹山)의 봉황깃털과 곤륜산의 옥이 되지만, 여러 병화를 거치면서 징험할 문헌이 없다. 또 400년 전의 일이라 그 유풍이 가리어져 자세하지 않다. 이는 태사공[사마천]이 이름이 없어지고 나면 불러 주지도 않음을 탄식한 것이다.
이철명 공은 자는 지지(知之), 호는 지헌(止軒)이다. 본관은 여주로 고려 향공진사 이세정이 선조가 된다. 조선조에 들어와 이윤방(李允芳)은 아들 둘을 두었는데, 장자 이지언(李之彥)은 공의 5세조이고, 차자 이춘언(李春彥)은 회재의 5세조이다.
홍치(弘治) 을묘면(1495) 진사시 2등에 합격하였고, 족숙으로 찬성에 증직된 이번, 진사 손계돈, 농암 이현보, 금헌 이장곤은 같은 해 갑자년(1504)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 기묘사화에 정암 조광조와 여러 사람을 잡아가두고 벌하자, 공은 마침내 벼슬에 마음이 없어져, 귀향부(歸鄕賦)를 지었는데, 대략 다음과 같다. 세상사 험난함에 두려워 장차 어디로 돌아가리아득히 머리 들어 바라보니 가서 기다리는 어머니를 위로해 드려야지부귀는 구할 것이 못되거늘 어찌 권세의 길목에서 주저하리오종을 불러다 길을 안내하여 오래된 사당의 소나무와 국화를 찾으리 옛 성현의 귀감을 읽으면서 하늘이 나에게 부여한 처음의 본성을 따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