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재기(學在己)공부하는 것은 자신이 하기 나름이고 지부지 재인(知不知 在人)나를 알아주고 몰라주는 것은 사람들의 몫이다.학이시습지불역열호(學而時習之不亦悅乎)공부하고 익히는 기쁨은 말로는 다 할 수 없고유붕자원방래 불역낙호(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멀리서 찾아오는 친구가 있어 그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人不知而不溫 不亦君子乎)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화내지 않으면 군자다.공자의 논어 첫 문장 학이(學而) 편이다.수기치인(修己治人) 자신을 연마하고 다스린 옛 선비들의 향기가 느껴지는 옥산서원이다. 옥산서원 어서각과 사저 독락당문고 서적이 866종 4,111책을 소장하고 있다. 향촌에 머무르며 세속의 출세에 집착하지 않고 학문에 뜻을 펼친 배움터다. 한편으론 중앙정계에 진출하기 위해 그 관문인 과거공부도 소홀하지 않았다. 사물의 이치와 인간본성을 탐구하고 도덕적 가치를 추구하며 정진한 선비들의 참교육장이다. 조선후기 서원은 교육 기능이 약화되고 시묘 기능이 강화되었다. 선현을 우러러 모시고 충효사상을 숭배하던 유교사회에서 서원은 사묘(祠廟) 역할도 충실했다.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 선생도, 회재 이언적 선생의 학문을 중심으로 성리학을 완성시켰다. 살아생전에 보지 못한 회재를 스승으로 삼고 성리학 학문을 높고 넓고 깊게 매겨 나갔던 것이다. 문원공 회재 이언적선생의 위패를 체인묘(體仁廟)에 모신 옥산서원은 전학후묘로 배치된 옛터전이다. 구인당 뒤 켠 높지막한 위치에 있다. 매월 초하루 보름 분향 알묘하고, 봄∙가을 제향 때는 문중의 후손과 유림들이 의관을 갖추고 제사를 지낸다. 체인(體仁)의 뜻은 어질고 착한 마음을 몸으로 익혀 실천에 옮긴다는 뜻이다. 회재사상의 실천철학이 묻어나는 현판이다. 영원불변한 우주의 이치를 사람의 어진 심성으로 다스려 덕업을 베푼다는 것이다. 자신을 수련하고 연마한 갈고 닦은 어진생각을 행동강령으로 이끄는 성리학의 근본을 실천하는 것이다. 자연의 순리에 따르며 평생을 인(仁)을 체득하는데 일관한 회재선생의 학문이 경이롭다. 체인묘 옆 작은 건물은 제기(祭器)를 보관하는 곳이다. 구인당 왼편을 돌아보면 신도비각(神道碑閣)이 굳건하다. 호남의 선비 고봉 기대성(高峰 奇大升 1527~1572)이 짓고, 아계 이산해(鵝溪 李山海) 글씨다. 고봉이 비문에 적기를 “우리나라는 옛날에 어질고 착한분의 교화를 입기는 하였으나 학문이 전승된 바가 없었다. 선생은 누구에게도 가르침을 받은 데가 없는데도, 스스로 학문에 정진하여 조용한 가운데 날로 빛남으로서 덕행(德行)을 실천했다. 찬연히 저술이 나와서 후세에 남긴 이는 우리 조선에서는 찾아보아도 이와 같은 이는 드물 것이다.”라는 선생의 행적을 쓴 퇴계 이황선생의 구절 일부를 옮겨 적고는 “사람이 가지는 사덕(四德)이 기질에 가려 성(性)은 이로 말미암아 잃게 되는데 학문으로써 회복하면 그 성을 찾게 된다. 아! 우리 공(公)은 이 일방(一方)에 탄생했다. 그 기(氣)는 관후하면서도 장중하고 덕은 혼연하면서도 강직했다. 처음부터 학문을 알아 몸을 닦고 실천에 힘을 쏟았다. 부지런히 충양(充養)하여 잘 간직하니 집에서는 효를 다 하고 나라에는 충을 다 하였다”고 적었다. 신도비는 1577년 대학자인 문원공 회재 이언적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후학들이 뜻을 모아 건립할 당시에는 옥산서원 앞에 있었으나, 훼손을 막기 위해 서원 안으로 옮겨졌다. 1577년 세워진 비의 전체 높이는 320cm, 비신의 높이는 240cm다. 구인당 뒤란 경각(經閣)은 4000여질의 고서를 소장하던 건물이다. 오래된 목조한옥이 열악해서 1972년 새로 지었다. 후손들의 정성으로 청분각과 태극문을 지어 많은 서적들을 보관하다가 2009년 건축한 유물관으로 모든 책을 옮겨 보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