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탑상」편에 무장사(鍪藏寺)의 사찰명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세상에 전하는 말에 의하면, 태종이 삼국을 통일한 뒤에 병기와 투구를 이 골짜기 속에 감추어 두었기 때문에 무장사라고 한다”
그런데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상도 경주부」편에서는 “무장사(鍪藏寺)는 부의 동북쪽 30리, 암곡촌(暗谷村)의 북쪽에 있다. 속설에 전하기를, 고려 태조가 삼국을 통일한 후에 무기와 투구를 골짜기 속에 감추었으므로 무장사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옛 비석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병기 또는 무기와 투구를 감추었기 때문에 무장사라고 한다는 내용은 동일하나 그 시기가 서로 다르다. 그런데 고려 태조와 관련이 있다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은 오기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무기와 투구를 감추었기 때문에 무장사라고 한다는 기록에도 문제가 있다. 투구도 무기의 한 종류라고 할 수는 있으나 칼, 창, 화살 등 당시 대표적인 무기를 두고 왜 굳이 투구[무(鍪)]를 감추었다고 했을까? 무기를 감추었다면 무장(武藏)이라 하고 사찰 이름도 무장사(武藏寺)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이 골짜기는 골이 깊어 산길을 혼자 오르기가 꺼림직하다. 그래서 날짜를 휴일에 맞추어 다시 무장사지를 찾았다. 보문단지 입구를 지나 농협연수원을 지나기 전 바로 좌회전을 하여 암곡으로 들어간다. 주차장에 차를 주차한 후 무장봉 쪽으로 가면 바로 오른쪽으로 개울 건너 길이 있다. 몇 주 전 이 길로 동대봉산 정상을 오른 적이 있다. 동쪽으로 난 길을 따라 가면 경주국립공원 암곡탐방지원센터에 이른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무장봉과 무장사지로 가는 탐방로이다.
무장사지까지는 경사가 심하지 않아 그리 힘들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등산로를 따라 한참을 오르면 저 앞으로 목제 통행로가 나타나고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삼층석탑이 우뚝하다. 탐방지원센터에서 무장사지까지 2.4Km인데 약40분 걸린다.
무장사와 관련하여 『삼국유사』「탑상」편 ‘무장사 미타전’조의 기록을 다시 살펴본다.
“서울 동북쪽 20리쯤 되는 암곡촌 북쪽에 무장사가 있다. 제38대 원성대왕의 아버지 대아간(大阿干) 효양(孝讓), 즉 추봉된 명덕대왕이 숙부인 파진찬을 추모해서 세운 것이다. 그윽한 골짜기가 몹시 험준해서 마치 깎아 세운 듯하다. 깊고 어두워 저절로 허백(虛白)이 생길만하고, 마음을 쉬고 도를 즐길 만한 신령스러운 곳이었다. 절의 위쪽에 아미타의 옛 전각이 있다. 소성대왕의 왕비 계화왕후(桂花王后)는 대왕이 먼저 세상을 떠났으므로 근심에 차서 어찌할 줄 모르고 지극히 슬퍼하여 피눈물을 흘리고 괴로워했다. 이에 그는 밝고 아름다운 일을 돕고 명복을 빌 것을 생각했다. 서방에 아미타라는 대성(大聖)이 있어 지성으로 그를 믿으면 잘 구원하여 맞아 준다는 말을 듣고 ‘이것이 사실이라면 어찌 나를 속이겠느냐’하고는 왕후가 입던 화려한 옷을 희사하고 재물을 관리하던 관청에 저장해 두었던 재물을 다 내어 이름난 공인들을 불러서 아미타불상 하나를 만들게 하고, 아울러 신중(神衆)도 만들어 모셨다.
이보다 앞서 이 절에는 늙은 중 하나가 있었는데 어느 날 꿈에, 진인(眞人)이 석탑 동남쪽 언덕 위에 앉아서 서쪽을 향하여 대중을 위해서 설법하는 것을 보고 속으로, ‘이곳은 반드시 불법이 머무를 곳이다.’라고 생각하고 마음속에 숨겨 두고 남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곳은 원래 바위가 험하고 시냇물이 급하게 흐르므로 공인들은 돌아다보지도 않았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좋지 못한 곳이라고 했다. 그러나 터를 닦을 때에는 평탄한 곳을 얻어서 집을 세울 만하여 확실히 신령스러운 터와 같으니 보는 이들은 깜짝 놀라 좋다고 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이후에 미타전은 허물어지고 절만 홀로 남아 있다” 위 기록으로 미루어 일연이 『삼국유사』를 집필한 고려 중기에는 일부 전각이 허물어지면서 점차 퇴락되어 간 듯하다. 그러나 주변에 흩어진 기와 편을 볼 때 조선시대까지도 법등은 미력하나마 이어져 왔던 듯하다.
그리고 “그윽한 골짜기가 몹시 험준해서 마치 깎아 세운 듯하다. 깊고 어두워 저절로 허백(虛白)이 생길만하고, 마음을 쉬고 도(道)를 즐길 만한 신령스러운 곳이었다.…”라는 표현에서 일연이 이곳을 직접 찾았음을 알 수 있다.
원성왕의 아버지가 숙부를 위해 창건하고 이후 소성왕의 비인 계화왕후가 남편을 위해 아미타전을 세웠다는 사실에서 천여 년 전 신라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을 읽을 수 있다. 특히 계화왕후가 왕위에 오른 지 1년여 만에 죽은 남편의 극락왕생을 기원하여 아미타전을 세웠다는 사실에서는 부부간의 애틋한 사랑을 느낄 수 있다. 이후 소성왕의 아우로 왕위에 오르게 되는 흥덕왕의 비는 소성왕의 딸인 장화부인이다. 『삼국유사』「기이」편 ‘흥덕왕과 앵무’에서 소성왕의 딸인 장화부인을 그리워하는 흥덕왕과 계화부인의 모습이 겹쳐진다. 신라 사람들의 부부지간의 각별한 애정에 새삼 숙연해진다. 유대의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는 좋은 아내를 얻은 사람이다”
계화부인의 축원으로 극락세계로 간 소성왕이 환하게 웃고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