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당나귀에서 봄 당나귀에게로                                                    유종인 건초가 허밍이면 생초는 육성肉聲일 게다 샛강의 너테들이 얼금덜금 풀려갈 때 해묵은 봇짐이 쏠리던 너덜겅이 떠오르네금이 간 김장독을 파내어 깨쳐서는 햇빛 속에 사금파리 마방진魔方陣을 펼쳐놓고 군동내 나던 말들은 햇것으로 맞춰보네방울도 다시 차고 시샘도 다시 고르고 술독에 용수 박고 새로 뜬 됫병 술을 새 주인 봄의 안장에 곁두리로 매달려네솟구치는 목청들과 꺼져가는 탄식들, 근심이 사는 마을과 꽃들의 들판 지나 해거름 발목이 접질려 시詩의 마을에 들겠네 -군동내 나던 말들을 햇것으로 입춘을 지났으니 봄 시편으로 유종인의 시조 한편을 읽어본다. 언어의 형식과 활용, 통사적 짜임이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작품이어서 마치 자유시를 읽는 느낌이다. 여기서 당나귀는 당연히 시인과 동일시된다. 자유자재한 짐승의 몸을 빌어 시인은 길을 간다. 제목이 암시하는 바와 같이 시인은 겨울에서 출발하여 봄으로 나아가고 있다. 넷째수 종장 결구가 “시詩의 마을에 들겠네”라니, 겨울 당나귀에서 봄 당나귀라니, 무슨 말일까? 그것은 시인으로 표상되는 당나귀가 언어의 험난한 겨울 짐승의 길을 거쳐 온갖 기운이 소생하는 봄 짐승의 언어에 가닿는 시 쓰기의 과정이라는 말이다. 그러고 보니 첫수 “건초가 허밍이면 생초는 육성肉聲일 게다”는 겨울풀(건초)과 봄풀(생초)의 차이를 통해 허밍이 아니라 육성의 살아있는 언어구사의 중요성을 화두로 던진다. 그 언어선택은 얼음 위에 다시 물이 언 너테의 길이며 봇짐이 쏠리던 너덜겅의 험한 길이다. 이어 둘째수에서는 “군동내 나던 말들은 햇것으로 맞춰보”는 시작 갱신의 과정이 이어진다.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수반되어야 하는 것은 “금이 간 김장독을 파내어 깨쳐서” 마방진 모양으로 펼쳐놓고는 새 단어로 교체하는 것이다. 마침내 셋째수 방울도, 시샘도 다시 고치고 “새로 뜬 됫병 술을 새 주인 봄의 안장에 곁두리로 매달려네”에 이르면 시작은 새로운 면모에 도달한다. ‘새술은 새부대에’라는 말처럼 언어는 “새로 뜬” 상태가 되어야 정체를 면할 수 있다. 넷째수 “솟구치는 목청들과 꺼져가는 탄식들, 근심이 사는 마을과 꽃들의 들판”은 자연과 세속의 가난 속으로 유랑하는 시인의 눈길과 발걸음이 닿는 대상들이다. 그 대상들에서 우리는 시인이 자신을 포함한 주변의 고단한 삶들을 외면하지 않고 위무하려는 의지를 읽을 수 있는데, 다른 시조시편들에서 보이는 소재들도 다 이런 것들에 수렴된다. 그런데 어찌할까? 시인은 해거름 “시詩의 마을에” 들 무렵 발목을 접질렀다. 어이쿠, 큰 일 났구나 싶은데, 그리 호들갑을 떨 일은 아니다. 더 이상 나아갈 필요가 없는 시의 완성 지점에 다다랐다는 것을 시인은 그렇게 넌지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능청도 이 정도면 보통이 아니다. 한 가지 더 눈여겨 볼 것은 ‘얼금덜금’, ‘너테’, ‘너덜겅’, ‘군동내’, ‘시샘’, ‘용수’, ‘곁두리’ 같은 고유어뿐만 아니라 ‘마방진魔方陣’ 같은 고어들도 피곤한 삶을 위무하고 다독이는 피붙이 같은 말들이다. 시어 선택과 구사에서 고유어들이 빚어내는 힘이 참으로 오롯하다. 그의 시조를 읽는 또 다른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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