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안이씨 두촌(杜村) 이팽수(李彭壽,1559~1596)는 안강출신 선비로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비로소 무과에 합격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의사(義士)이다. 두촌선생은 부친 이거(李琚)와 모친 오천정 씨 정이함(鄭以咸)의 따님 사이에서 기미년(1559) 4월 8일에 안강현 도리촌(島里村)에서 태어났다. 고조부 이지(李地)가 서호(西湖)에서 경주 안강현으로 처음 이거하였고, 증조부는 이대생(李大生), 조부는 이세발(李世發)이다. 어려서부터 행실이 남달랐는데, 10살에 부친상을 당해 낮밤으로 빈소를 떠나지 않았고, 예도(禮度)가 어른과 다를 것이 없었으며, 마을에서 효자라 칭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현손인 이두경(李斗經)이 지은 「유사(遺事)」등에 그의 행적이 실려 있다. 『무명자집』에 의하면, 경주의 이팽수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순절하였는데, 정조년간 계묘년(1783)에 그의 후손인 인와(忍窩) 이술현(李述賢,1736~1822)이 조정에 상언하여 증직(贈職)과 정려(旌閭)를 받았다고 전한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두촌은 붓을 던지고, 의병을 모아 각지에서 적을 무찌르고, 6월에는 경주성 탈환을 위한 문천회맹(汶川會盟)에 가담하였으며, 이후 당당히 무과에 급제하여 복병장(伏兵將)으로 울산 서생포 방어를 맡았지만 젊은 나이에 순국(殉國)하였다. 온유재(溫裕齋) 윤종섭(尹鍾燮,1791~1870)은 「속정충록서(續精忠錄序)」에서 “창의하여 변경을 진압함은 탁월하게 빛났으나, 배향되지 못하였으니 늘 안타깝다(其倡義鎭邊 卓然赫赫 而不及餟享則是積欠也)”며 의병에 대한 후속조치가 미흡함을 지적하였다. 번암 채제공(1720~1799)의 「忠臣李公墓碣銘」, 청대 권상일(1679~1759)의 「李義士墓誌銘 並叙」, 간옹 이헌경의 「鷄林李義士招魂辭 幷引」․「李義士傳」, 약남 이헌락(1718~1791)의 「招魂墓詩」, 이계 홍양호의 「贈兵曹參判李公彭壽旌閭記」, 金尙集의 「旌閭記」, 양암 정존겸(1722~1794)의 「旌閭碑文」, 여와 목만중(1727~1810)의 「李義士㫌閭記」 등이 당시 의병활동을 뒷받침한다. 당시 경주부윤 정존겸(재임 1759.09~1760.07)․홍양호(재임 1760.07~1762.06)․김상집(재임 1777.09~1779.05) 등의 도움으로 조정에 알려졌고, 1783년에 이르러 후손 이술현 등이 조정에 선조의 일을 아뢰어 가선대부 병조참판으로 추증되고, 표충각(表忠閣)을 세워 그의 업적을 기리게 되었다. 후손이 엮은 『杜村實記』가 전하고, 1924년에 안강읍 산대리에 건립된 덕산서사(德山書社)에 배향되었다.증 병조참판 이 공 팽수 정려기(贈兵曹參判李公彭壽旌閭記) - 이계 홍양호 계림은 신라의 옛 도읍으로, 예로부터 빼어난 선비들이 많았다. 경진년(1760)에 나는 계림 부윤이 되어 몸소 산천을 둘러보고 옛사람의 자취를 찾았다. 일찍이 안강현을 지나는데 길가에 묘소가 보였고, 지역사람이 가리켜 말하길 “이곳은 이 의사(義士) 혼을 불러들여 장사지낸 곳입니다”라 하기에, 나는 공경과 예를 갖추었다. 그 남은 후손을 물으니, “이술현이라는 자가 있습니다”라 하였다. 여러 생원 중에 재주가 빼어났고, 고을 서당에서 노니는데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자기 선조의 일을 가져와 나에게 보여주었다. 이팽수(李彭壽) 공은 본디 벼슬아치 집안으로 4대조에 호서에서 영남으로 이거하였다. 어려서 기이한 자질이 있었고, 10세에 부친상을 당해 애통해하며 빈소를 떠나지 않았고, 향리에서 효동(孝童)이라 칭송하였다. 장성해서는 임진년에 왜란을 당해 왜놈들이 쳐들어오자 임금이 탄 수레가 서쪽으로 사냥 갈 때 비분강개하여 눈물을 흘리며 “아버님은 무덤에 계시고, 나는 대대로 녹을 먹는 후예로 어찌 가만히 앉아 책만 보고 있겠는가?”하고는 마침내 붓과 벼루를 던지고, 활 쏘고 말 달리는 재주를 익혀 갑오년에 무과에 합격하였다. 을미년(1595) 겨울, 절도사 박진(朴晉)이 공의 명성을 듣고 추천해 복병장(伏兵將)이 되었다. 이때 적병이 바닷가를 거점으로 세력이 매우 컸고, 관군이 거듭 패하였다. 공은 기꺼이 일어나 부인 손씨에게 “내 지금 죽을 때이다.”라 말하였는데, 한 아들이 포대기에 있었으나 돌아보지 않았다. 종 5, 6명과 마을의 20여명이 따라 나아갔고, 마침내 울산 진장의 한 무리에 다다랐다. 서생포에 닿자 강어귀에 매복하고, 적이 나오길 엿보다가 갑자기 급습해 쳤다. 공은 매번 선봉에 섰고 적들이 두려워 감히 마음대로 하지 못하였다. 수개월을 차지하였으나, 적이 큰 병력을 끌어들여 공격은 더욱 급박하였다. 공은 병사는 적고, 화살은 다 떨어져, 짧은 무기를 들고 힘써 싸우다가 온 군대가 모두 전멸하였으니, 이때가 병신년(1596) 정월 4일이었다. 왜란이 잠잠해지자 집안사람이 시신을 찾았으나 찾지 못하였고, 마침내 의복을 수습해 혼을 불러다가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술현은 “선조께서 나라의 어려움에 목숨 바친 것이 이같이 위엄 있지만, 당시 군대가 모두 전멸하였고, 사적은 드러나지 못하였으며, 자손은 미미하여 여전히 선조를 드러내지 못하고 있으니, 이 때문에 매우 한스럽습니다.”라 울면서 말하였다. … 임금이 특별히 정려를 명하고 말하길 충신의 집안은 영의정 정존겸이 아뢰었고, 가선대부 병조참판에 추증됨은 이술현의 영화이다. 내게 와서 기문을 청하였고, 내 이미 그 죽음의 본말을 알기에 글을 지어 다음과 같이 칭송한다. 군자는 자신을 희생해 인을 이루고, 명성을 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위의 사람을 바로 세우지 않는다면 후대의 사람 그 누가 권면하겠는가? 때문에 적노라. 그 마을을 표창하고 풍속과 명성을 심는 것은 대개 왕정(王政)의 급한 바이다. 우리 임금께서 이에 곡진하여 지난달에는 손씨를 정려하였고, 이 달에는 이씨를 정려하였으니, 모두 계림인이다. 이곳 영외(嶺外)의 선비를 따라 반드시 유풍을 듣고 일어나는 자가 많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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