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서원 시초는 조선시대 1542년(중종 37) 안향의 옛 집터에 사당을 짓고 제사하며 선비 자제들을 교육한 백운동서원으로 전한다. 세계문화유산 목록에 오른 9곳 서원의 년대와 선현을 배향한 위패는 이러하다. 경북 영주 소수서원 1550년(명종 5)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이다.회훤 안향(1243~1306) 경남 함양 남계서원 1552년(명종 7), 현판 사액 1556년(명종 11)일두 정여창(1450~1504) 경북 경주 옥산서원 1572년(선조 5), 현판 사액 1574년(선조 7)회재 이언적(1491~1553) 경북 안동 도산서원 1574년(선조 7), 현판 사액 1575년(선조8)퇴계 이황(1501~1570) 전남 장성 필암서원 1590년(선조 23), 현판 사액 1662년(현종 3)하서 김인후(1510~1560)대구 달성 도동서원 1605년(선조 38), 현판 사액 1607년(선조 40)한훤당 김굉필(1454~1504) 경북 안동 병산서원 1613년(광해 5), 현판 사액 1863년(철종 14)서애 류성룡(1542~1607) 전북 정읍 무성서원 1615년(광해 7), 현판 사액 1696년(숙종 22)고운 최치원(857~?) 충남 논산 돈암서원 1634년(인조 12), 현판 사액 1660년(현종 원년)사계 김장생(1548~1631) 서원의 원생들은 교육의 일원으로 성리학을 숭상하고, 「소학」「대학」「논어」「맹자」「중용」「시경」「서경」「주역」「예기」「춘추」등의 순서로 배웠다. 윤리학적 체계를 갖춘 다음 「가례」「심경」「근사록」「사기」 등을 읽어 뜻을 넓혀 나갔다. 옥산서원을 둘러싼 친화적 자연환경은 학문을 배우고 익히는 학생들에게 더 할 나위 없이 아늑한 지리적 조건이다. 옥산서원 출입문에는 한석봉 글씨 역락문(亦樂門) 현판이 걸려있다. 공자의 논어 학이(學而) 편 문장에서 취한 구절이다. “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有朋自源方來 不亦樂乎)벗이 멀리서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벼슬도 세력도 내려놓고 초야에 묻혀 지내는 선비를 찾아드는 것은 세속의 물욕에 욕심이 없는 이들이다. 선생의 학문적 철학사상과 덕업을 구하고저 각처에서 사람들이 찾아드니 그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고매한 인격과 사리에 밝은 인품으로 위기지학 가치를 추구한 선비 회재 이언적 선생의 뜻이 담겨있는 현판 대문이다. 역락문 들어서면 2층 누각 무변루(無邊樓)다. 중국 송대(宋代) 철학자 주염계 ‘풍월무변’ 문장에서 따온 말이다. 자연을 벗 삼아 끝없이 자신을 갈고 닦는 정서를 감지하는 곳이다. 누각 통로를 거쳐 흙 마당에 선다.아담한 한옥 처마로 옥산서원(玉山書院) 큼직한 현판글씨가 반긴다. 맨 처음 현판글씨는 아계 이산해(1539~1609)가 썼다. 현종5년(1839) 화재 후 사액을 받아 추사 김정희가 다시 썼다. 편액 왼쪽에 “만력갑술사액후260년기해실화개서 선사(萬曆甲戌賜額後二百六十年己亥失火改書 宣賜)” 추사가 54세 때 쓴 편액이다. 아계 이산해∙추사 김정희 옥산서원 편액은 흰 바탕에 검은 글씨다. 임금이 하사한 편액의 표본이다. ‘토정비결’ 저자인 토정 이지함의 조카 아계 이산해 현판은 안쪽에 걸려있다.댓돌에 신발을 가지런히 벗고 강당격인 구인당(求仁堂) 대청마루에 앉는다. 그 예날 선조들의 수기치인(修己治人) 진리구현에 정진하던 모습이 얼비친다. 회재 선생의 저서 구인록(求仁錄)에서 발췌한 구인당(求仁堂) 현판은 한호 석봉글씨다. ‘구인’의 뜻은 성현의 학문이 ‘인’을 구하는데 있다 함이다. 옥산서원 내 석봉글씨는 ‘역락문’ ‘무변루‘ ’구인당’ 현판글씨가 있다. 구인당 대청마루 양쪽 좌우로 해립재(偕立齋)∙양진재(兩進齋) 협실이 있다. 지금의 교장실 교무실 역할이다. 유교사상에서 수기치인 뜻을 세워 밝고 바르게 경건한 심신을 갖추어 사물에 대처한다. 도덕과 인격수양을 신의로 만사에 적응한다는 성인에 이르는 행동강령이다. 운동장이라기엔 협소한 미음자 마당 동서로 툇마루가 소박하다. 민구재(敏求齋) 암수재(闇修齋) 학생들이 공부하고 생활하는 기숙사 역할이다. 민첩하게 구한다는 뜻의 ‘민구’는 공자가 제자들에게 자신은 “천재가 아니라 단지 열심히 지식을 구하는 사람” 논어의 ‘민이구지자야(敏以求之者也)’에서 취한 글이다. ‘암수’는 중국 남송 때의 유학자 주희(朱熹)의 암수자수(闇修自修) 글귀이다. 조용히 스스로 공부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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