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자놀이                                  김보나 내 방엔 뜯지 않은 택배가여러 개 있다심심해지면상자를 하나씩 열어 본다오래 기다린 상자는갑자기 쏟아지는 풍경에 깜짝 놀라거나눈을 떴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그건 착각이야세계는누군가 눈을 뜨기 전에먼저빛으로 눈꺼풀을 틀어막지나는 상자가 간직한 것을 꺼내며 즐거워한다울 니트의 시절은 지났고이 세제는 필요하다새로 산 화분을 꺼내덩굴을 옮겨 심으면내 손은 순식간에 흙투성이가 된다그래도 돼뮤렌베키아 줄기가 휘어지는 방향을 따라가도 돼친구는 이것을 선물하면서식물은쏟아지는 빛의 자취를 따라가며자란다고 말했지방을 둘러보면여전히 상자가 수북하다이삿짐이거나유품 같다빈 상자가 늘고열 만한 것이 사라져 가면나는 이 방을 통째로 들어리본으로 묶을 궁리를 해 본다 -상자라는 이름의 폐허 혹은 죽음 택배 상자보다 더 팬데믹 시대를 설명하는 기호가 있을까? 사람들은 나가기를 꺼리고 필요한 물품은 손쉽게 택배를 신청한다. 방에는 뜯지 않은 상자가 쌓여간다. 심심해지면 그 상자를 하나씩 열어보는 놀이를 즐긴다. 오래된 상자 속 내용물들은 어둠 속에서 주인을 만나려 더 이상 설레지 않는다. 왜냐하면 세계는 내용물이 눈을 뜨기도 전에 빛으로 눈꺼풀을 막아버리기 때문이다. 상자 속 내용물들은 울니트처럼 반쯤은 시효를 상실했다. 그래도 나는 아직은 상자를 열어보며 즐거워하기로 한다. 새로 산 화분을 꺼내 심으며, 친구가 보낸 뮤렌베키아 그 휘어진 방향을 따라가는 굴광성을 포기하지 말아야지, 다짐을 한다. 그러나 날마다 쌓여가는 상자들은 이삿짐 같다가 유품으로 변해버린다. 유품이라는 말 속에는 섬뜩함이 있다. 그것은 폐허이거나 생명의 죽음을 담보로 하기 때문이다. 이제 세계는 죽음이 남긴 유품으로 가득해지리라. 빈 상자가 늘어가면 내가 앉아 있는 이 방도 상자가 되어버릴 것이다. 내가 그 속에 담긴 거대한 상자, 나는 이 방을 통째로 들어 리본으로 묶을 궁리를 하게 되는 것이다. ‘상자놀이’를 통해 폐허가 되어가는 이 시대를 능청스럽게 짚는 아픈 시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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