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선사의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삼국유사』 「의해」 편 ‘사복불언’ 조에 “사복의 어머니가 돌아가시니 이때 원효(617-686)가 고선사에 머물고 있었는데……”의 기록으로 보아 신문왕(681-692)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고려사』에 1021년 5월(고려 현종 12) “상서좌승 이가도에 명하여 이 절에 있던 금란가사와 불정골, 창림사에 있던 불아(佛牙)를 가져오게 하여 내전에 안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 미루어볼 때 이때까지는 고선사가 폐사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1913년 일제강점기 일본인 학자가 이 절터에서 서당화상(誓幢和尙) 비편을 발견하였다. 이 비는 원효대사의 행적비로 『삼국유사』의 기록대로 고선사에 원효가 주석하였음을 확인하고 있다. 이후 고선사지가 덕동댐의 건설로 수몰되기 전 1975년 문화재관리국 산하 경주유적관리사무소에 의해 발굴조사 되었다. 원효(元曉)에 대한 호칭은 다양하다. 『삼국사기』 「열전」 ‘설총’조에서는 원효거사(元曉居士), 『삼국유사』 「기이」편 ‘태종 김춘추’조와 「탑상」편 및 ‘낙산 이 대성 관음 정취 조신’조 등에서는 원효법사(元曉法師), 「이해」편 ‘이혜 동진’, ‘의상전교’조 등에서는 원효대사(元曉大師), 같은 조 ‘원효불기(元曉不羈)’조에서는 성사(聖師), 일제강점기인 1915년 일본인에 의해 고선사에서 발견된 서당화상비에는 화상(和尙)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 『신증동국여지승람』 ‘분황사’ 조에는 화쟁국사라고 하였다. 원효가 일시적으로 환속하여 요석공주와의 사이에서 설총이 탄생하였기에 거사라 칭했던 것이다. 법사란 부처의 가르침에 정통하고 교법(敎法)의 스승이 되는 스님을 이른다. 그리고 일반 대중에서는 대사라고 불리었는데 대사란 고승 대덕 즉 큰스님을 이른다. 이외에도 성사란 선정에 통달한 스님, 화상은 신심이 돈돈하며 깊이 정진한 스님, 국사란 스님 중 가장 높은 등급으로 나라의 스승이 될 만한 스님에게 조정(朝廷)에서 내린 칭호이다 이와같이 원효에 대한 다양한 호칭으로 미루어 그는 두루 거침이 없는 최고의 스님이었다. ‘사복불언’ 조에 의하면 당시 고선사에 주석하던 원효가 신이한 행적을 보이던 사복(蛇福)과 함께 사복의 어머니 장례를 치렀다. 또 ‘이혜동진’조에 의하면 원효가 오어사에 주석하던 혜공을 찾아 ‘여시오어(汝屍吾魚)’ 법거량을 하고, 불법에 대해 묻곤 했다고 한다. 당시 원효는 이곳 고선사에서 무장산을 너머 자주 오어사를 다닌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2007년 가을 경주학연구원에서 공부할 당시 고 이근직 교수의 지도로 암곡에서 무장산을 너머 원효스님이 다니던 길을 더듬어 오어사까지 답사를 다녀온 적이 있다. 암곡 공영주차장을 출발하여 무장봉 억새 군락지를 지나 북동쪽으로 10여 Km 거리인데 약 3시간 정도 걸린 것으로 기억된다. 길을 찾느라 헤맨 적도 있었다. 이 정도의 거리라면 당시 원효스님이 수시로 오어사를 찾을 정도였을 것이다.『삼국유사』 「의해」 ‘원효불기’ 조에는 벼루를 소의 두 뿔 사이에 놓고 삼매경소를 짓고 대안법사가 바로잡았다는 구절이 있다. 이 기록 등으로 미루어 사복, 혜공, 대안 등은 한때 원효보다 뛰어난 고승이 아니었을까 추정되기도 한다. 한국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이자 종교인인 원효(元曉, 617~686). 이 나라 불교의 새벽을 활짝 열어젖힌 그는 성과 속을 자유로이 넘나들던 무애도인(無碍道人)이자 분열과 다툼을 종식시킨 화쟁(和諍)의 달인이었다. 일정한 스승이 없었지만 뛰어난 저술들로 동아시아 불교를 주도한 사상가였으며, 광대의 옷을 걸치고 불교의 이치를 노래로 지어 민초들에게 들려준 거리의 성자였다. 원효는 과거의 인물이 아니다. 오늘날까지 한국인들의 큰 존경을 받는 불교인이며, 가장 많은 연구가 이뤄지는 사상의 바다다. 그렇기에 한국불교가 원효를 닮아 가면 대중의 마음을 얻을 것이요, 원효와 멀어지면 불교의 본령을 잃게 되고 결국 대중의 번뇌만 들끓게 할 뿐이다. 학계 일부에서는 7세기 동아시아에 불교 3걸이 있었다고 하는데, 인도로 불전을 찾아 나선 현장, 아예 중국의 불교를 창조한 혜능, 그 사이에서 한역 교학을 자신의 삶에 귀환시킨 원효가 있다.『송고승전』은 이렇게 원효를 찬탄했다. “경전의 의미에 정통하고, 그것을 삶에 최고도로 접목시켰다(蓋三學之淹通. 彼土謂爲萬人之敵, 精義入神爲若此也)” 원효의 전기(傳記)는 현재 ‘송고승전(宋高僧傳)’ ‘고선사(高仙寺) 서당화상비(誓幢和上碑)’ ‘삼국유사(三國遺事)’ 등에서 전해진다. 원효 스님과 인연된 사찰이 전국에 100여 군데 넘고, 스님과 관련된 설화는 손으로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만큼 우리 불교계에 미친 영향이 지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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