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 그러라고 할지
강영선
시어른이 돌아가시고 아무도 살지 않는 시골집에서안부 전화가 왔다노인정에 가기는 어정쩡한 젊은 노인에게 방을내주어도 되냐고 동네 이장이 묻기에그러라고 했다마당의 빈터는 앞집에서 농기구를 갖다 놓아도되냐고 묻기에 그러라고 했다샘가 감나무에 감이 무겁게 열리자 옆집에서곶감을 좀 보내 줄 테니 감을 따도 되냐고 묻기에그러라고 했다빈 닭장에 닭을 키우고 싶은데 그래도 되냐고 묻기에그러라고 했다전기도 수도도 끊어 놓은 그 집에 물이 들어오고불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동네에서 가장밝은 집이 된 빈집빈집의 주인은 빈집인데멀리 있는 아들 내외에게 물어 온다떼 내지 않은 나무 문패는 옛 주인의 이름으로 살아 있어하늘 번지수를 동사무소 가서 물어야 할지그러면 그러라고 할지
-주인, 그리고 주소라는 말
고향 마을에 갈 때마다 늘어나는 것이 빈집이다. 사람 사는 집보다 빈집이 더 많은 마을도 부지기수. 농촌 인구는 자꾸 감소하고 거주하는 이도 대개는 새우처럼 등이 굽은, 유모차를 끄는 분들이다. 도농불균형은 이제 걷잡을 수 없어졌다.
이 시도 그런 바탕에서 연유한다. 실제적으로 시에 서술된 상황이 일어났을 것이다. 이장이 안부전화가 와서, ‘젊은 노인’에게 방을 내주어도 되느냐고 묻고, 그게 허락되자 연이어 앞집에서는 “농기구를 갖다 놓아도 되냐고 묻”고, 옆집에서는 “곶감을 좀 보내줄 테니 감을 따도 되느냐”, “빈 닭장에 닭을 키”워도 되느냐 자꾸 묻는다. 그럴 때마다 “아들 내외”는 인심 좋은 주인인 듯 “그러라”는 말만 되풀이한다. 그러다 회의한다. 어라, “빈집의 주인은 빈집인데/멀리 있는 아들 내외에게” 왜 자꾸 물어 오는 거지? “그러라”고 했던 우리들의 말은 그럴 자격이 있어서 했던 걸까? 그렇다면 “떼 내지 않은 나무 문패” 속 “옛 주인”의 주소지를 동사무소에서 물어야 하나? 시인은 푸쉬킨의 말처럼 “사색의 열매를 완성시켜” 간다.
이 시는 모든 것을 비워냈기에 인간과 동식물, 무생물까지 보듬어 안을 수 있는 무無의 세계를 보여준다. 또 계속해서 “그러라” 하면서 주인 노릇하던 시적 화자가 나중에는 빈집의 주인이 빈집임을 알아가면서 허명뿐인 옛 주인의 번지수도 찾아줘야 하는데, 동사무소 가서 물으면 “그러면 그러라고 할지” 유쾌하고 엉뚱한 반전을 만드는 매력도 있다.
새해에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시가 없을까 해서 고른 작품인데, 2022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당선작이니 그야말로 따끈따끈한 시인데, 고향 마을에 가기라도 하면 어디라도 볼 수 있는 풍경을 시침 떼듯 그린 한 편의 시를 읽는 마음이 왜 이리 애잔해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