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정확하게는 삼국지연의 10번 읽은 사람과는 말도 섞지 말라고 한다. 다양한 인생전략을 알아 함부로 대할 수 없다고 여겨서다. 삼국지가 어떤 책인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다. 유럽 고전에 호머의 일리아더가 있다면 그와 맞먹을 동양고전으로는 단연 삼국지일 것이다. 등장인물의 방대함나 드라마틱한 전개로 볼 때는 오히려 삼국지가 훨씬 낫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만큼 삼국지를 다룬 작가도 많고 소설뿐 아니라 만화와 애니메이션, 드라마와 영화, 심지어 게임으로도 만들어지는 등 동양 문화 콘텐츠의 핵심으로 인기를 끌었다.
처음 삼국지를 접한 것은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 아버지 박봉현 님의 독송에서 시작된다. ‘독서(讀書)’, 아버지는 문자 그대로 삼국지를 소리 내어 읽으셨다. 옛사람들이 책 읽을 때는 소리 내면서 노래하듯 흥얼흥얼했는데 아버지 역시 그 영향을 받으셨을 것이다. 나는 엎드린 채 책 읽으시는 아버지 옆에 드러누워 잠이 올 때까지 삼국지를 들었다. 아버지의 삼국지는 월탄 박종화 선생이 쓴 양장본 삼국지 다섯 권이었는데 어린 나이에, 그것도 귀동냥으로 읽던 삼국지가 얼마나 재미있었던지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 그게 내 독서의 첫 출발이자 독서편력의 계기였다고 판단할 때 아버지의 삼국지는 독서는 물론이려니와 문화의식 전반을 통털어 내 일생에서 가장 중대한 변곡점이었다. 아버지가 출근하시고 나면 혼자서 고사리손으로 삼국지를 띄엄띄엄 넘겨 보았다. 월탄 삼국지에는 고전적인 삽화들이 종종 그려져 있어 그 삽화를 보는 재미로 책을 뒤적거린 것이다.
당연히 첫 삼국지도 월탄의 삼국지였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처음으로 끝까지 다 읽었는데 그때 책 읽던 게 얼마나 신났던지 그 영향으로 6학년 때 도서부원으로 활동했고 덕분에 온갖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었다. 삼국지는 중학교 1학년 때 다시 읽었는데 이때부터 삼국지 매니아가 되었다. 중학교 때 독서와 클레식 음악에 미치다시피 하다 학교 성적이 나빠졌다. 나중에 경주고 들어가면서 성적미달로 지원서를 써주지 않아 고생했고 결국 벼락공부 끝에 거의 꼴찌로 합격했다. 그게 삼국지로부터 받은 재앙이라면 참 뜻 깊고 고마운 재앙이었다.
고교시절 이후에도 삼국지를 읽었는데 그때부터는 종류를 바꾸면서 읽었다. 정비석 삼국지, 이문열 삼국지, 황석영 삼국지 등을 읽었고 나관중 원본의 번역본으로 황병국, 김유수 씨 등의 책을 읽었다. 만화 삼국지도 즐겨 읽었는데 고우영 삼국지를 시작으로 이문열 삼국지의 만화 버전, 재일 한국인 2세인 이학인의 만화 창천항로, 이현세 삼국지 등이 대표적이다. 당연히 중국에서 제작한 드라마도 즐겨 보았다. 1994년대 왕부림 감독 제작판, 2010년 가오시시 감독 제작판 삼국지를 다 섭렵했다. 그 중간중간의 단편화 된 삼국지들, 적벽대전, 무신조자룡, 용의 부활, 명장관우, 명장여포 등 영화는 말할 필요 없이 다 보았다.
이런 모든 소설과 만화책, 드라마, 애니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삼국지는 창천항로다. 이 창천항로는 애니메이션으로도 나왔는데 이건 만화보다 더 재미있었다. 대부분 삼국지가 유비를 편드는 내용인 반면 창천항로는 조조의 영민함에 무게를 두고 다루었다. 창천항로는 특히 심리묘사에 탁월했다. 전쟁이라는 살벌한 긴장 속에 우리가 아는 영웅들의 속마음이 어떻게 망가지고 얼마만큼 이기적으로 변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여포에 대해 대부분 삼국지가 부정적이었던 반면 이곳에서는 단순하기는 하지만 무신의 자질을 갖춘 무적영웅으로 묘사한 것도 이채롭다. 만화에서나 애니에서나 그림체가 독특해서 더 좋았다. 모두 36권으로 다루다 보니 5~10권짜리 만화들에 비해 삼국지 내용들을 훨씬 자세하게 실은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장점이다. 각 권들마다 이야기의 흐름에 맞추면서도 특정 주인공을 중점적으로 내세워 심층적으로 묘사한 것도 눈길을 끈다. 관우가 오나라와 대립하다 전사하는 것으로 끝나 그 뒷이야기들을 볼 수 없었던 것은 아주 큰 유감이다.
많은 삼국지를 읽으며 그중 누군가를 롤 모델로 삼고자 했다면 단연 유비다. 유비는 자신의 처지를 냉정하게 파악해 때를 기다릴 줄 알았고 사람을 가슴 깊이 품은 의리파다. 백성을 아끼는 자상한 지도자로 대외적으로 충성을 내세우면서도 자신의 실리를 취한 현실적 인물이다. 조조가 모든 것을 갖춘 가문에서 자신의 천재적 기량을 마음껏 드러낸 데 비해 유비는 자수성가형이란 면에서 실제로 따라 할 수 있는 성공사례이기도 하다. 무적의 창술로 일세를 풍미한 조자룡의 무를 닮고 싶어 꾸준히 운동한 것도 삼국지의 영향이다. 한 면의 지면에서 다 설명하기 힘든 놀라운 책이다. 이 모든 것이 아버지의 삼국지 독서에서 비롯된 것이다. 삼국지가 내 책읽기의 시작이기에 실상 이 글은 아버지 박봉현 님을 헌정하는 글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