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이씨 수졸당(守拙堂) 이의잠(李宜潛,1576~1635)은 문원공 회재 이언적의 손자로, 부친은 판관을 지낸 수암(守庵) 이응인(李應仁), 모친은 옥산장씨 장응기(張應機)의 따님이고, 계비(繼妣)의 막내로 태어났다.
이의잠은 가학을 통해 학문을 익혔고, 1612년 사마시에 합격 후, 음서(蔭敍)로 1616년에 참례찰방(參禮察訪)이 되었다. 1617년에는 휴가를 받아 고향에 돌아와 동래온천으로 행차하던 한강 정구를 만났고, 퇴계의 제자인 지산(芝山) 조호익(曺好益,1545~1609)을 따라 배우며, 퇴계학을 익혔다. 조호익의 연보를 보면, 1607년 영천의 도잠서원 망회정(忘懷亭) 곁에 서재를 지었는데, 이때 양동의 이의혼·이의잠 등이 건립을 도모하였고, 게다가 조호익은 흥해 곡강서원(曲江書院)에 회재 선생을 봉안하는 축문을 짓는 등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그리고 1621년에 내직으로 들어가 내시(內寺)가 되었고, 얼마 후 하양현감(河陽縣監)에 임명되었으나, 1625년에 병을 이유로 벼슬을 그만두었다. 그러자 하양현 백성들이 초상화를 그려 사모의 마음을 전하였다고 한다.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서재를 지어 ‘수졸당(守拙堂)’이라 하고, 시렁에 많은 서책을 두고 학문의 의리를 깊이 탐구하였다. 특히 1632년에 『회재집』「부록유례(附錄類例)」를 편집·간행하였고, 그의 행적은 후손에 의해 정리되어 『수졸당일고(逸稿)』가 전한다. 경주는 임진왜란 초기에 큰 타격을 입은 고장으로, 지역의 여러 문인들 역시 가족과 국가를 위해 붓을 던지고 의병에 가담하였다. 그 가운데 수졸당 이의잠도 행동을 함께 하였다.
난고(蘭皐) 남경훈(南慶薰,1572~1612)의 『난고선생유집』에 의하면, “9월에 금난수 문원, 이의잠 병연, 손엽 문백, 조동도 경망, 정세아 화숙 등 여러 의사와 출병하여 팔공산에 이르러 10여 차례 힘껏 싸우다가 경주 의병장 이눌이 적의 탄환에 맞아 신음하며 일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각각 시를 지어 근심을 말하다(九月 與琴聞遠 蘭秀 李炳然 宜潛 孫文伯 曄 趙景望 東道 鄭和叔 世雅 諸義士 進兵至八公山 力戰十餘合 慶州義將李訥 爲賊丸所中 呻吟不起 故各賦詩以道憂㦖)”등 이의잠의 팔공산 의병활동을 뒷받침한다.
함께 거론된 손엽·최계종·권응생 등 의병장은 당시 혁혁한 공을 세웠다. 특히 최진립과 최계종의 활약상 그리고 권응생은 약관의 나이로 당숙인 권사악(權士諤)과 작은아버지 권사민(權士敏)과 함께 인근 주민과 노복들로 의병을 조직해 곽재우의 휘하에 들어가 전공을 여러 번 세웠다. 게다가 손엽의 「용사일기(龍蛇日記)」, 최동보의 「신협일기(神篋日記)」는 의병 활동 당시의 상황을 기록하였고, 훗날 사미헌(四未軒) 장복추(張福樞,1815~1900)와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1827~1899) 등이 이의잠의 묘갈명을 지어 행적을 전하였다.
비록 이의잠의 의병활동이 타인의 기록으로 소수 전하지만, 제대로 연구되지 않아 안타까움이 많다. 지금이라도 이의잠을 비롯한 경주의 여러 선비들이 의병으로 참가한 사적을 밝히고 제대로 연구되었으면 한다.하양현감 수졸당 이 공 묘지명 병서 - 장복추 이의잠 공은 용모가 옥과 같고, 영특하였다. 겨우 4세에 모친상을 당하자 부친 판관공이 기르고 가르쳤으며, 일찍이 잠시도 그 은혜를 잊지 않았다. 장성해서 무첨(無忝) 이의윤(李宜潤)과 설천(雪川) 이의활(李宜活) 두 형을 따라 항상 옥산 선조의 서원에서 독서하고 더욱 힘써 매진하였다.
임진년(1592) 여름에 왜란을 만나 판관공을 모시고 산 속으로 피신해 충심으로 극진히 봉양하였으며, 가을에 본부 의병에 달려가 사림들이 옥산서원에 문묘의 위패를 봉안할 때 공은 삼가 받들어 지켰다. 계사년(1593)에 부친상에 역병에 걸렸으나, 겨우 일어나 힘써 정성을 다해 초상을 치르고 3년 여묘살이의 제도를 다하였다,
을미년(1595)에 의병이 창도하여 참봉 손엽(孫曄,1544~1600)·남포현감 최계종(崔繼宗,1570~1647)·참봉 권응생(權應生,1571~1647)과 함께 토의하여 많은 왜적을 참수하고 사로잡았다.
병신년(1596)에 청송에서 대암(大庵) 박성(朴惺,1549~1606) 선생을 따라 의심스럽고 어려운 것을 강론하고 질의하였다. 이 해 가을에 공산회맹(公山會盟)에 참여하였고, 그 다음 해 가을에는 병사를 이끌고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1552~1617)의 진영에 달려가 적을 방어하는 계책을 도왔다. 우락재(憂樂齋) 최동보(崔東輔,1560~1625)와 ‘삶을 버리고 의리를 취하는(舍生取義)’에 대해 논의하였는데, 말이 매우 사리에 합당하였다.
기해년(1599)에 지산(芝山) 조호익(曺好益,1545~1609) 선생을 뵙고 주역·시경·심경을 배웠고, 또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1563~1633) 선생을 따라 배워서 학업을 마쳤다.
아! 공의 선행과 훌륭한 공적은 선대의 아름다움을 이을 만하였으나, 불행히도 작은 고을에 살았고, 덕망에 부합할 만큼 장수하지도 못하였다. 또 유문(遺文)도 불에 타서 남은 것이 천백에 겨우 한둘이니, 애석하도다. … 공의 8세손 이재종(李在鍾)이 칠십의 나이에도 200리 길을 멀다하지 않고 가장(家狀)을 갖추어 나에게 와서 묘지명을 부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