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양대교                                                                                        신용목 얼음과 수증기 사이에 있다고 말하면, 꼭 겨울 빙판과 여름 구름 사이에서 물은봄과 가을 같지만 봄과 가을만 흘러가는 계절 같지만달빛 안장 위의 밤 어느 것이 쉬울까, 바다에 빠진 웅덩이를 찾는 일과 웅덩이 속에서 바다를 찾는 일강에서 눈사람을 부르는 일과구름을 꺼내는 일 가양대교 위에서 어둠과 물을 구별하는 일 아니, 우리가 물주머니 같은 거라면물풍선처럼 웃음을 터트리는공원에서 나무가 잎을 피우고 짙어지고 또 잎을 떨구는 일은 꼭 흘러가는 일 같다바람갈퀴를 흩날리며 달려가는 나무를 별빛의 채찍질로 후려치는 일은꼭 사라지는 일 같다어느 것이 맞을까, 다리를 걸으며 밤을 건넌다는 것과 밤을 걸으며 다리를 건넌다는 것어느 것이 꿈일까, 나는 물의 눈동자가 제 깊이 속에 엎드려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았다밤과 어둠이 서로를 바꾸고 사람과 사랑이 서로를 잃어버리는 바다를 보았다 어느 것이 틀릴까,나는 봄과 가을이 나란히 흰 말과 검은 말을 타고 달려가는 것을 보았다 -불가분不可分과 불가지不可知의 세계에 대하여 신용목은 참 좋은 서정 시인이다. “나는 그들이 통증처럼 뱉어내는 새떼를 보았다 먼 허공에 부러진 촉 끝처럼 박혀 있었다”(「갈대 등본」)의 새떼 묘사는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았던가. “대가 자랐다 바람의 이빨자국이다”(「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에서 바람의 이빨자국을 보는 것도 그렇지만, 세월에서 단단한 걸 건져내는 웅숭한 시선을 보라. “내가 가장 훔치고 싶은 재주는 어둠을 차곡차곡 쌓아올리는/저녁의 오래된 기술”(「공터에서 먼 창」) 같은 문장도 아무나 쓸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가 올 가을에 낸 시집『비에 도착하는 사람들은 모두 제시간에 온다』의 시세계는 한층 느긋하고 유연하고 원숙해졌다. 이무것도 아닌 것 같은데 우리를 후려친다. 인용시 「가양대교」는 다리를 걷는 경험 하나로 깊이를 이끌어내는 가편이다. 1〜4연까지의 구절은 오로지 5연 “가양대교 위에서 어둠과 물을 구별하는 일”을 위해 쓰여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말들이 불필요한 건 아니다. 예컨대 3연 “달빛 안장 위의 밤”은 끝연 “봄과 가을이 나란히 흰 말과 검은 말을 타고 달려가는 것”에 대응된다. 당연히 흰말은 여름을 검은 말은 겨울을 상징한다. 요지는 이런 것이다. 밤의 가양대교 위에서 어둠과 물은 구별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다리를 걸으며 밤을 건넌다는 것과 밤을 걸으며 다리를 건넌다는 것”도 어느 것이 맞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바다에 빠진 웅덩이를 찾는 일과 웅덩이 속에서 바다를 찾는 일”도 쉽지 않기는 마찬가지. 그건 결국 “밤과 어둠이 서로를 바꾸고 사람과 사랑이 서로를 잃어버리는 바다”에 이르게 되는 것이기에. 주의할 것은 ‘사람과 사람이’가 아니라 ‘사람과 사랑이’이다. 그렇다. 이건 이렇고 자건 저렇다라는 인식, 분별지分別智만큼 어리석은 것이 어디 있으랴. ‘시인의 말’에서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제 열 개를 알게 된 것 같다. 그리고 그 열 개의 끝에는 문지기처럼 사랑이 서 있다는 것” 놀랍지 않은가. 쉽게 판단을 내릴 일이 아니다. “비는 떨어질 때만 존재한다”는 말도 그런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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