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암곡(暗谷)과 황룡골(黃龍谷)로 발길을 옮긴다. 암곡은 원래 깊은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라 어두웠으므로 ‘암곡’ 혹은 ‘암실’이라 하였다. 또 왕산(王山)이라는 산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왕산’이라 하고 경주 사람들은 ‘왕새이’라고도 하였다.
필자에게는 과거 이 골짜기를 찾는 것이 고행의 길이었다. 중학생 시절 몇 차례 나무를 하러 다닌 곳이다. 집에서는 족히 40-50리나 되는 길이었다. 새벽 4시경 출발하여 나뭇짐을 지고 집에 도착하면 저녁 9시경이 되었다.
황룡은 문무왕이 왜구들이 자주 출몰하여 나라를 혼란에 빠뜨리므로 동해안을 둘러보고 돌아오는 길에 이곳을 지나면서 절경을 이루는 황색 단풍과 함께 산세가 용의 머리 형상을 하고 있어 황룡이라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이 골짜기에 황룡사(구황동의 황룡사와는 다른 절)가 있어 ‘황룡이라고 했다는 설도 있다.
50년 전 필자는 재 너머 지역으로 출퇴근을 하면서 8년여 거쳐 지나던 곳이다. 당시 경주 감포 간 도로는 비포장이었다. 에어컨이 없던 때라 여름이면 창문을 열고 뽀얀 먼지를 그냥 들이킬 수 밖에 없었다.
이시형 에세이 ‘어른답게 삽시다’에 의하면 기억을 담당하는 해마와 감정을 담당하는 편도체는 아주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고 있어서 감정이 부착된 기억은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오래 남는다고 한다. 그런데 기억은 우리가 저장해 놓은 것을 그대로 두지 않고 시간이 흐르면 새롭게 편집을 한다. 나쁜 감정의 경우 시간이 지날수록 자꾸 좋은 쪽으로 왜곡하려는 경향이 있다. 우리를 행복하고 즐겁게 만들어 주려는 것이 뇌의 본능적인 작용이기 때문이다. 정신 분석에서는 뇌의 이런 성질을 쾌락주의 원칙(Pleasure Principle)이라 한다.
헐벗고 굶주리던 그 시절이 비참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고 오히려 아련한 그리움으로 남은 것이 바로 이 원칙 때문일까? 당시에는 그렇게 고통스러울 수가 없었는데 지금 당시의 추억을 더듬으면 기억 저편에서 무지개가 떠오른다.
덕동과 황룡골을 찾으려면 먼저 보문단지를 지나야 한다. 보문호는 1952년에 착공하여 1963년 준공하였다. 필자가 어린 시절이었다.
“남포 터졌나?”
정오가 되면 정확하게 보문저수지 공사장에서 다이너마이트를 터뜨렸는데 남포란 다이너마이트를 가리킨다. 일반 가정에는 대부분 시계가 없었던 시절이었기에 날이 맑으면 그림자로 시간을 대충 짐작할 수 있었지만 흐린 날은 시간을 알 길이 없었다. 그래서 이 폭파음이 점심시간 신호탄이 되었던 것이다. 이후에는 소방서인지 경찰서였던지 정오에 사이렌을 울려 시각을 알려주었다.
덕동호는 1975년 완공되었다. 얼핏 보아서는 보문호가 훨씬 커 보이나 실제 저수량은 덕동호가 보문호의 3배에 이른다. 이 덕동호가 완공되기 전 3년 동안 버스를 타고 비포장의 이 도로를 따라 출퇴근을 했었다. 덕동호에 물을 담기 이전 도로는 지금보다 훨씬 골짜기 아래를 지나고 있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에 따라 바뀌는 창밖의 풍경에 취해 1시간 여의 출퇴근 시간이 지루함을 느끼지 못했었다. 관해동 고개 마루로 오르면 지역 주민들이 차창 밖으로 복분자 등을 팔기도 했다. 지금도 경감로를 지나면 당시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최근 퇴임을 한 교직 후배들과 매주 산을 찾는다. 한 달여 전에는 황룡골인 추령에서 불령봉표와 용연폭포를 거쳐 기림사를 다녀왔다. 또 수 주 전에는 암곡에서 동대봉산을 너머 시부거리로 내려왔다. 처음에는 임도를 따라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었으나 산사태로 임도가 끊어진 부분부터는 길이 명확하지 않아 애를 먹었다. 특히 낙엽이 무릎까지 차올라 걷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어디가 길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수차례 넘어지기도 했다. 낭떠러지를 지날 때는 다리가 후들거리기도 했다.
이제부터 고선사지, 무장사지, 황룡사지를 둘러보고 모차골을 지나 용연폭포를 거쳐 기림사, 골굴사, 감은사지, 이견대, 대왕암에 이르기까지 옛 신라인들의 자취를 더듬어 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