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난다. 먼 나라 남의 일이지만 괜히 화가 난다. 미국의 한 억만장자가 대학교 기숙사 설계에 돈을 기부한 것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문제는 기숙사 침실에 창문이 없다고 한다. 연예인 강호동 버전으로, 이게 머선 일이고?
올해 10월 산타 바버라 소재 캘리포니아대(UC Santa Barbara)에서 승인된 새로운 기숙사 디자인이 나왔다. ‘멍거 홀(Munger Hall)’이라는 이름의 이 기숙사는 자그마치 4500명의 학생이 한꺼번에 입주할 수 있는 11층짜리 초대형 기숙사라고 한다. 건물에 사람 이름이 붙어 있으니 기부자가 분명한데 과연 그는 누구인가? 워런 버핏(Warren Buffett)의 투자회사인 벅셔 해서웨이의 부회장이자 그의 오랜 친구인 찰리 멍거(Charlie Munger)다. 세계 최고 갑부 중 한 명인 워런 버핏은 알다시피 투자의 귀재라는 별명의 미국 기업인이자 투자가다.
97세인 그가 기부한 돈이 무려 2356억 원이란다. 두 숫자 모두 놀랍다. 그런 그가 엄청난 돈을 기부하면서 유일한 조건을 걸었다. 바로 ‘창문은 절대 안 돼(No Window)!’란다. 아무리 아마추어 건축가라지만, 현장에서 정규 교육을 받거나 경험을 축적한 적도 없다고는 하지만, 무슨 억화심정이 있어 눈앞에 활짝 펼쳐진 태평양 해변을 기어코 막으려는 건지 알 수 없다. 건축물은 주변의 경관을 고려할 수밖에 없는데, 굳이 천혜의 자연조건을 없애가면서까지 유지하고 싶은 그의 철학(똥고집?)은 무엇일까? 그의 2356억 원짜리 이유가 걸작이다. “기숙사 방이 작고 창문이 없으면 학생들이 공용 구역으로 나올 것이며, 그러다 보면 다른 학생들을 만날 기회가 더 많아질 것”이라는 논리를 편다. 학생들의 반응은 이렇다. “이게 말이 돼?”, “죄 없는 나한테 감옥이라니!”, “이거 법적으로는 문제없는 거지?”
공간 실용성과 업무의 효율성을 극대화하려는 시도는 구글(Google)이나 애플(Apple) 같은 글로벌 IT기업이 주도하는 트렌드다. 일터의 형식과 공간을 무너뜨리고 기존에 없던 공간 분화를 통해 일터이며 동시에 놀이터이자 새로운 제품을 키워가는 창조 공간으로 만들려는 시도다. 그런데 기업의 창조적 파괴에 대학 기숙사도 보조를 맞추어야 할 당위성은 없어 보인다.
그렇다고 유리창을 꽁꽁 막아야만 다양한 전공과 관심 분야의 학생들이 어울리는 건 좀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목적과 그것에 이르는 수단 내지 방법을 다시 한번 환기해 봐야 한다. 유리창이 없어야만 밖으로 나온다는 발상 자체가 ‘햇빛의 결핍에서 나온(!) 아이디어’다. 볕 잘 들고 파도 소리 들리는 기숙사 방에 모여 수다 떨고 맥주잔 기울이다 보면 더 창의적이고 생산적인 결과가 나올 수 있다. 수단이 목적을 통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건축비 절감이나 투신자살을 방지하겠다”는 기부자의 논리도 궁색해 보인다. 가령 수영장 회원들은 오늘도 소독약 냄새나는, 온갖 먼지와 땀, 심지어 누군가의 실례(!)가 섞인 수영장 물을 기꺼이 마신다. 기꺼이는 좀 과장이고 삼키는 경우가 없지 않다. 눈과 피부를 자극하고 구토나 장염의 위험을 안고서도 물어서 안 나오는 이유는 선명하다. 그냥 수영이 좋아서다. 수영하고 나서의 그 개운함이 좋고 오늘도 뭔가 열심히 살았다는 그 뿌듯함이 좋아서 수영한다. 부정적인 몇 가지 이유로 웬만해서는 긍정적이고 열정적인 태도를 이길 수 없다. 어마어마한 돈을 기부해놓고서는 건축비 절감이란 명분은 좀 아니다.
한편, 내가 좋은 취지에서 기부했으니 너희들은 무조건 내 조건을 따르라! 는 발상도 좀 멋지지 않다. 상식과 지혜를 가진 지성인을 배출하는 대학에서 어째 이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기부자는 기숙사 말고 실험실을 꾸미려는 건 아닌지 싶다. 우리가 다 아는 유명한 실험이 있다. 문이 활짝 열린 실험실에서 전기충격을 가하면 보통 개는 바로 도망간다. 당연하다. 하지만 출구 없는 곳에서 전기 충격에 오래 노출된 개는 문이 열린 공간에서 다시 실험을 해도 도망은커녕 그냥 끙끙대며 고문을 당하고 있더란다. 실험으로 얻은 교훈은 ‘무기력은 학습된다’는 사실이다. 창 없는 방에서 나오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지속적이고 예외 없이 유리창 없는 기숙사에 있다 보면 누구라도 그 불쌍한 개가 될 수 있다. 우리가 경험하는 자유는 우리를 둘러싼 공간의 그것에 영향을 받는다. 탁 트인 바다를 보고 자란 아이가 성냥갑 아파트에서 자란 아이보다 정서적으로 더 풍요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