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권씨 대은(臺隱) 권경(權璟,1604~1666)은 영해(寧海) 괴시마을 출신으로, 관어대(觀魚臺) 곁에 살면서 스스로를 ‘대은’이라 하였다. 하담(荷潭) 김시양(金時讓,1581~1643)의 문하생으로 벼슬을 멀리하였고, 집 주변에 석양정(夕陽亭)을 짓고 학문을 닦으며 후학양성에 힘썼다. 모친 초상에 예를 다하였는데, 꿈에 신인이 나타나 관어대 아래에 무덤을 조성하라는 계시를 받는 등 효행이 빼어나서 영해부사(寧海府使) 최혜길(崔惠吉,1591~1662)이 그의 덕행을 듣고 조정에 천거하였기도 하였다.
권경의 둘째 아들 권득여(權復輿)는 셋째 사위 손건(孫鍵)을 맞이하였고, 손건의 장남이 바로 사헌부 지평(持平)을 지낸 매호(梅湖) 손덕승(孫德升,1659~1725)이었다. 매호는 안강읍 대동소류지 북쪽의 대동마을에 매호초당을 짓고 살면서, 수신과 효행을 가르친 인물로, 반구서원 건립 이후 외조부의 지평 추증을 고하는 글[外祖臺隱權公贈晦齋寒岡三先生職焚黃告由文]을 지었고, 그렇게 외조부 사후 1711년(숙종37)에 사헌부 지평에 추증되었다.
그의 행적은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1720~1799)과 추암(楸菴) 김하구(金夏九,1676~1762) 등 묘갈명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으며, 영해 도계정사(陶溪精祠, 현재 청암서원)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대은집』이 있다.
권경은 손자 손덕승이 태어나기 훨씬 이전인 인조 25년(1647) 3월에 대구부사 만회(晩悔) 이유겸(李有謙,1586~1663)․통판(通判) 이박(李璞) 등과 경주지역을 유람하고 「유월성록(遊月城錄)」을 지었는데, 경주의 월성을 맨 먼저 찾아 둘러보았고, 첨성대-오릉-나정-포석정-용장산 매월당-삼층석탑-반타암(盤陀巖) 등 주로 남산 주변과 용장골 등을 상세히 기술하였다. 유람 당시에 경주부윤은 김상(金尙,재임1647.10~1648.09)이었지만, 권경은 김상(金相)으로 표기하였으니 기록의 오류로 보인다. 게다가 포항 내연산(內延山)을 유람한 「유내연록」 그리고 종질(從姪) 권우경(權虞卿)과 청량산(淸凉山)을 유람한 「유청량산록」을 저술하는 등 산수유람에도 관심이 많았다.유월성록(遊月城錄) - 대은 권경 내 어릴 적부터 월성 산수의 빼어남 승경(勝景)을 들었으나, 땅이 경상도라 멀어서 평소에 소망을 이루지 못하다가, 정해년(1647) 봄에 말 한 필에 종 한 명과 월성으로 향하였다. 연당(蓮堂)에서 수령을 만났는데, 수령은 새로 사귄 자였다. 인사를 마치고 차를 내어와 이전 조정의 일을 말하는데 흥미진진하여 싫지가 않았다. 윤해량(尹海良)에게 숙소를 정하게 하고, 해량 역시 여러 형승에 대해 자세히 말하는데, 마치 곳곳을 두루 상세히 그림을 보는 듯하였다.
다음날 해량은 나를 위해 길을 인도하였고, 먼저 월성에 올랐다. 반달의 황폐한 터는 나무 그늘과 무성한 수풀로 가득하고, 평평한 들판에는 찔레꽃이 일대에 피었으며, 길게 흐르는 시내는 세차게 흐르는데 신라 천년의 슬픈 감정이 있었다. 한번 두루 둘러보니 서악이 서쪽에 있고, 금강산이 남쪽에 있으며, 그 아래에 첨성대가 있었다. 첨성대는 무릇 30층으로 다듬은 돌로 주위를 쌓았고, 가운데 하나의 구멍을 통해 오르내리는 계단으로 삼았으니, 신라 시대 천문(天文)을 점치고, 천시(天時)를 물은 곳이다.
이날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가벼운 바람이 산들산들 불었다. 마침내 도롱이 쓰고 말 타고 오래된 못 안압지를 찾았다. 금강산․매월당․포석정․오릉․나정 등에 이르는 곳은 말과 종이 피로해서 가지 못하고, 병든 새처럼 날아오르지 못함이 있었다. 바야흐로 돌아갈 즈음에 수령이 종을 시켜 나에게 동행을 요구하기에 마침내 오릉에 참배하였다. 오릉은 신라 시대 다섯 왕의 능이고, 평평한 숲 풀이 우거진 가운데 용과 호랑이처럼 감싸는 지세도 없고, 산과 강을 옷깃처럼 띠 두르는 세력도 없어서 내가 보기에도 왕가에서 사용하는 묘소와 풍수지리의 이치가 아닌 것 같았으니, 또한 잘 모르겠다.
나정으로 향하였다. 평평한 들판에 네 모서리 초석이 있고 가운데 하나의 큰 반석이 있었다. 반석 위 네 모퉁이에 몇 척의 혈석(穴石)이 있는데, 돌 표면은 모두 부처 향상이 있었으니, 이곳은 신라 시대 불교를 숭상하던 시절 절을 세운 곳이 아니겠는가? 포석정에 투숙하였다. 시냇가에 작은 두둑이 있는데, 두둑 위에 유상곡수 형태의 자취가 완연히 있는데, 신라 왕이 매번 좋은 날에 기생들을 데리고 노닐며 잔치를 벌인 곳이다. …수령이 용장산 매월당 빈터에 술자리를 마련하였는데, 빈터는 절개의 선비 김시습이 스님이 되어 은둔한 곳이다.
다음 날 아침 마침내 수령과 작별하고, 여름에 만날 후일을 약속하고 돌아갔다. 이날은 정해년 3월 하현의 하루 전날이었다. 태수는 경주부윤 김상(金相), 함께한 자는 대구 부백 이유겸(李有謙), 통판 이박(李璞), 광릉일사 심종적(沈宗迪), 단양산인 권경옥(權景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