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굴암 찬가 오동춘
경주 토함산 석굴암 국보 세계문화유산 자연석 둥근 지붕 흙덮힌 굴된 그 안에 근엄한 본존불 얼굴 미소 자비 넘친다 부모 위해 석굴암 짓는 김대성 건축가 경덕 혜공왕 때 천재 솜씨로 만든 석굴암 첫 이름 석불사 되어 대자대비 불심 불탔다 화강암 콩고물인 듯 빚어 세운 본존불상 통일신라 세계 백미 불교문화 꽃핀다 과학과 예술신 합쳐 이룬 석굴암 석가로 보인다 본존불 뒤로 십일면관세음보살상 자비롭다 굴 속 상단 좌우의 열 개 반구형 감실 다양한 불상 모습들 반가사유상 아닌가?
석굴암은 창건 이래 조선 말기까지 보수과정이 시행되었다. 석실 전체 해체된 것은 일제강점기가 처음이다. 해체전후의 기본에 충실한 기록을 남기지 않아 석굴암조각상들의 원래 구조와 위치를 알 수가 없다.
천년을 찬란히 꽃피워온 자연적 과학기술의 결정체 습도조절 환기를 봉쇄해버렸다. 지하수로는 그 당시 신소재로 우월하던 아연관으로 막았다. 이로 인해 석굴암내부에 습기가 차는 원인이 되었다.
일제는 석굴암을 자신들이 발견하여 수리하였으며, 문화적 역량을 발휘하는 우월성을 자랑삼고 식민통치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이용했다.
1918년 포항과 경주를 연결하는 동해남부선이 개통되고, 불국사·석굴암 관광 활성화를 도모하기 위해 불국사역이 설치되었다. 불국사·석굴암은 전국각급학교의 수학여행지 인파로 붐볐다.
석굴암 복원공사는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이 교차한다. 해방이 되면서 석굴암은 1960년 초 우리 손으로 복원되었다. 일제 때 둘러친 시멘트 위에 1m의 공간을 두고 시멘트를 덧발랐다. 석굴속의 온도와 습도를 조절하는 환기장치기구를 설치했다. 석굴암에 악영향을 미치는 자연조건을 차단하기 위해 목조전실과 유리벽을 설치했다. 외부 앞뒤 차단된 석굴암은 스스로의 자생능력을 완전히 잃고 습도온도 조절을 인위적으로 대처하고 있다.
석굴암 본존상의 방향은 ‘동남동 29.4도, 대왕암의 위치는 동남동 28.5도’ 동짓날 해 뜨는 방향과 일치하다. 중국에서는 동짓날을 한해의 끝이 아니라 새해의 시작으로 매긴다. 동짓날 둥글게 떠오르는 태양을 맞이하며 석굴암대불의 위력으로 나라와 백성의 안민을 기원하기 최적의 곳 신라적 석불사다. 강우방 박사는 2014년 가을 ‘석굴암의 건축과 조각’ 문화재해설 강좌에서 이렇게 설했다.
‘떠오르는 태양이 암흑을 물리치듯, 석가모니의 깨달은 진리는 무명(無明)을 깨뜨리기에, 자연의 태양과 진리의 태양이 마주치는 순간은 가장 장엄한 광경이 된다. 토함산 석불사 앞에서 맞는 일출이 다른 어느 곳에서 보다 감동인 것은 그러한 인류역사의 대전환을 예고한 위대한 종교적 상징이 응집된 장소이기 때문이다’
‘예술작품을 볼 때는 아름다움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숨겨져 있는 진리를 알아내야 한다. 진리가 표현되어 있을 때 예술품은 비로소 위대한 것이 된다. 따라서 위대한 정신을 표현하려고 노력하였을 때만 예술품은 아름다운 것이 되고 동시에 거룩한 것이 된다. 그 때 비로소 독창적인 예술이 탄생 된다’
문화의 흐름을 반추해 독창적으로 해석하고 표현의 기법을 예술로 승화시킨 신라인의 정신세계가 거룩하다.
토함산석굴암본존불 일출의 배경을 찬미한 ‘야나기 무네요시’ 글이다. ‘지금부터 3년 전인 1916년 9월 1일 오전 6시 반, 화창한 태양빛이 바다를 건너 굴원(屈院)의 불타얼굴에 닿았을 때 나는 그의 곁에 섰다. 그것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행복한 순간의 추억이다. 불타와 그를 둘러싼 여러 불상이 놀라운 새벽 햇살로 선명한 그림자와 흐르는 듯한 선을 보인 것도 그 순간이었다. 굴원 안 깊숙이 서있는 관음의 조상(彫傷)이 세상에서도 보기 드문 아름다운 모습으로 미소 지은 것도 그 순간이었다. 오직 새벽빛을 통해서만 볼 수 있는 그녀의 옆얼굴은 지금도 나의 숨을 죽이게 한다’
석불사 절 이름은 일반적으로 석굴암으로 불러지고 있다. 창건연기설화에 `석불사`라는 명칭 기록이 분명히 전해진다. 건축·조각·종교·수학·과학, 자연의 원리까지 내재한 조화로운 석불사다. 석굴암으로 불린 이유는 명확하지 않으나 문헌에 나타는 것은 조선시대 정시한(丁時翰) 산중일기(山中日記)(1688년)에서 비롯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