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징어 게임〉 시즌이 끝이 났다. 전 세계를 상대로 한 한바탕 광풍이었다. 하지만 그 게임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증거들은 곳곳에서 확인된다. 쉬는 시간에 초등학교 아이들이 모여 딱지치기를 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이긴 학생이 진 녀석의 뺨을 때리는 시늉을 한다는 거다. 드라마에서처럼 말이다.
게임은 이기거나 지거나 딱 두 가지 경우의 수밖에 없다. 비기는 경우도 있지만 이내 승부를 내게 마련이다. 경험상, 딱지치기의 묘미는 절대 안 넘어갈 것 같은 상대방 마분지 딱지를 기어이 넘기는 데 있다. 이기거나 지거나, 모든 스릴, 재미와 흥분은 딱 거기에 집중된다. 그러니 이기고도 또 하고 싶고, 지더라도 “이번에는 반드시 이긴다!” 하고 소매를 걷어붙인다.
유희하는 인간(Homo Ludens)을 주장한 네덜란드 학자 하위징아(Johan Huizinga)는 놀이의 자발성을 강조했다. 사실 우리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곧잘 놀이를 한다. 하지 말라고 해도 기어이 놀이를 해왔다. 새로운 놀이를 만들기도 하고 기존의 놀이를 상황에 맞게 변형도 시켰다. 놀이는 자발적 행위이며 인간의 자유의지와 결을 같이 한다. 그래서 타인이 시키거나 강압에 의해 행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놀이가 아니다. 유사하게 보일지라도 그 행동의 목적이 외재적(外在的)이라면 단호히 놀이가 아니다. 놀이는 인간의 자발적인 동기와 행동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언제라도 그만둘 수 있어야 진정한 놀이다. 놀이가 외재적 목적에서 비롯될 때, 가령 드라마에서처럼 눈앞에 돈다발이 쏟아진다거나 현금다발이 쌓이고 사라지는 걸 지켜보는 노름일 경우, 쉽게 그 놀이를 그만둘 수 없게 된다. 그래서 드라마 속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는 ‘연령 제한 등급’을 받은 노름이지 놀이가 아니다.
드라마에 나오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구슬치기〉, 〈딱지치기〉 등은 우리 어린 시절 추억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내 흑백의 어린 시절을 함께 만들던 친구들이 문득문득 떠올라 드라마에 집중이 잘 안 되었다. 극이 살벌하게 전개되는데 내 입꼬리는 한 번씩 올라간다. ‘늘 코를 훌쩍이던 내 친구 일룡이는 지금 어디서 뭐 하고 있을까?’
드라마를 같이 보고 있는 아들 눈에 저 놀이들은 추억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전투씬에 가까운 눈치다. 한국의 어느 아빠와 아들의 세월을 단절시켜 놓은 이 드라마, 외국인들은 그럼 어떻게 봤을까?
요즘 유튜브에는 드라마에서 나온 체육복을 입고 유럽 한복판에서 딱지치기하는 영상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드라마에서처럼 유튜버가 이기면 뺨을 때리고 상대가 이기면 돈을 준다. 당연히 진짜 지폐였고 낯선 경기에 참여하기를 독려하는 좋은 미끼다. 유튜버가 이긴다 해도 실제 뺨을 때리지는 않고 대신 안아준다. 재미있는 것은 딱지치기가 처음이라서 지는 게 당연한 상대 외국인이 손가락 하나를 흔들며 한판 더! 하고 조르는 모습이다. 힘도 모자라고 기술도 없지만 제대로 약(!)이 오른 동생이, 내리 이겨대는 형의 뒷다리를 붙잡는 모습 그대로다. 직각으로 내리찍어서는 절대 넘어가지 않는 딱지치기의 비밀을 알 리 없지만, 이들은 마음껏 낄낄대며 게임을 즐기고 있었다.
드라마 한 편이 놀이의 성격을 왜곡했다고 호들갑이지만, 우리가 그렇게 약하지만은 않다는 걸 보여주는 일이 벌어졌다. 젊은 아주머니가 자동차 접촉사고를 냈다. 드라마대로라면 죽거나(!) 적어도 뺨을 맞아야 할 일이다. 블랙박스를 확인했더니, 중년 아주머니(피해자)가 젊은 아주머니(가해자)를 마치 사고를 당해 경황이 없는 딸을 위로하듯 얼굴을 어루만지고 등을 토닥이고 있다.
고열에 시달리는 아이를 태우고 급하게 차선을 바꾸다가 낸 사고였지만, 어쩔 수 없이 가해자와 피해자가 생겼다. 하지만 피해자는 자신은 괜찮으니 애를 데리고 얼른 병원엘 가보라고 했다고 한다. 아픈 아들도 나았으니 모두가 이긴 게임이 되었다.
〈오징어 게임〉의 각본과 감독을 맡았던 황동혁님이 시즌 2를 찍겠단다. 부디 이번에는 게임의 즐거움이 공포나 두려움에게 자리를 넘겨주지 않기를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