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은 드물게 석가탑이나 다보탑 등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보통 절 이름을 앞에 붙인다. 절터만 남아 있는 경우는 그 절터 이름, 절 이름도 알 수 없는 경우에는 마을 이름이 들어간다. 이어 층수 및 재료 순으로 명명하고, 층수를 알 수 없는 경우에는 층수를 생략한다. 이런 원칙에 의해 이곳 천군동 절터에는 동·서 2기의 탑이 있어 ‘천군동사지 동·서 삼층석탑’이라고 한다. 1938년 천군동사지 발굴에 이어 무너져 있던 이 석탑도 복원되었다. 이때 3층 탑신 상부에서 사리공이 확인되었으나 사리장엄구는 발견되지 않았다. 이후 절터에 대한 발굴조사가 더 이상 진행되지 않고 현재 석탑 2기만 덩그러니 서 있을 뿐이다. 동·서 두 탑은 모두 2층 기단에 삼층 탑신으로 되어 있다. 수리 당시 훼손이 심한 기단부는 새로운 부재로 보충하고 부분적으로 시멘트로 채웠다. 그러나 탑신부의 경우 일부 옥개석이 파손된 것 외에는 비교적 보존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두 탑은 현재의 지면보다 낮아 주위 흙을 파내었다. 기단부의 하층 기단 바깥쪽으로는 판석으로 탑구(塔區)를 둘렀다. 탑구의 모서리에는 ‘ㄱ’자형 석재를 깔고, 그 사이에 ‘一’자형의 판석 3매를 끼워 넣었다. 하층 기단은 면석과 갑석이 각각 1매로 되어 있는데, 결구는 모서리에 ‘ㄱ’자형 귀틀석을 두고 중앙에 면석 1매씩을 끼워 넣어 총 8매로 구성되었다. 하대 갑석 위에는 호형(弧形)과 각형(弧形) 몰딩을 둘러 상대 면석을 받치고 있다. 상층기단의 결구법은 하층기단과는 달리 4매의 판석이 엇물려 결구되었는데, 새로 보충한 부재가 많고 서탑은 신부재의 추가로 부재의 숫자에 차이를 보인다. 상대 갑석은 4매로 구성되었다. 갑석의 하단에는 1단의 갑석부연을 두었고 상단 중앙에는 2단의 각형 받침을 두어 초층탑신을 받치고 있다. 3층인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석이 각각 별도의 석재로 총 6매이다. 탑신은 모두 네 모서리에 우주를 새겼을 뿐 면에 문비 등의 장식은 없다. 옥개석은 모두 5단의 층급받침을 지니고 상면에 2단의 각형 받침을 두어 위층 옥개석을 받치고 있다. 옥개석 귀마루 위 합각선에 1개, 양쪽 전각면에 1개씩의 풍탁을 매달았던 구멍이 뚫려 있고, 상륜이 결실된 동탑 3층의 옥개석 위에는 원형의 찰주공이 남아 있다. 동탑의 상륜부는 모두 결실되었으나 서탑의 경우 노반 위에 복발만 남아 있다. 2009년 이곳을 찾았을 때에는 복발 위로 보륜 2매와 보주가 있었는데 이후 유실된 듯하다. 노반은 양쪽에는 우주를 새기고 그 위로 1단의 띠를 돌리고 다시 그 위로 돌출시킨 단을 1단 마련하고 네 모서리에 十자형으로 외연(外緣)을 처리하였다. 복발은 4곳에 꽃무늬를 두고 2줄의 띠 매듭을 돌려 장식성을 더하였다. 동탑은 탑 주위에 아무런 사설이 되어 있지 않으나 상대적으로 보존 상태가 양호한 서탑은 철제 울타리가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 이 양 탑은 탑구를 제외하고 기단부에 16매, 탑신부에 6매 등 초기 신라 석탑에 비하면 석재의 숫자가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다. 특히 기단부 외곽에 보이는 탑구는 이 탑의 가장 큰 특징이다. 탑구는 초기 감은사 서삼층석탑에 나타나고 8세기 중엽에 이르면 사라지게 된다. 따라서 탑재의 숫자는 감소했지만 초기 신라석탑의 잔영이 남아 있는 특징을 지닌다. 또한 8세기 상하층 기단 탱주가 모두 2개인 석탑 가운데 하층기단 결구법에 있어 ‘ㄱ’자형 귀틀석을 쓰고, 상층기단을 판석으로 결구하는 가장 이른 시기의 탑이다. 이곳 천군동사지 석탑은 감은사지와 보문리 사지의 석탑보다 양식상 늦은 시기로, 창건 연대를 8세기 후반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현재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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