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단잉어                                                김륭 비단잉어에게 비단을 빌려당신에게 간다 바람이 불고 있다 그러나바람은 글을 쓸 수 없어서 못 다한인생에 피와 살을 더할 수 없고당신은 누워 있다 요양병원 침상에 누워만 있다떠날 수 있게 하려면 물에 젖지 않는종이가 필요하다 나는 지금죽어서도 뛰게 할 당신의 심장을고민하고 있고, 당신은 아주 잠깐 동안이지만반짝인다 비단잉어에게 빌린비단을 들고 서있는 나를 쳐다보고 있다허공에 고양이수염을 붙여주러 온미친 비행기인양, 내가 낳았지만 더 이상은어쩔 수 없다는 듯걱정 마, 엄마는지금 엄마 배 속에있으니까 -비단잉어에게 비단을 빌리는 마음의 비애 누각이나 꾸며놓은 정원의 연못 속에서 유유하게 헤엄치는 비단잉어를 본다. 지느러미를 파닥이며 느긋하게 헤엄치다가 먹이를 던져주면 떼를 지어 와서 그것을 먹는다. 그 중에는 등이 하얘진, 거의 기진해가는 비단잉어도 있다. 시인은 “요양병원 침상에 누워만 있”는, 이미 일어설 수도 없게 된 엄마에게서 그 비단잉어를 본다. 현실적으로는 안 된다는 걸 알지만 시인은 몸을 받은 엄마에게 영원한 삶을 주고 싶다. 이 사무치는 자식의 바램이 “비단잉어에게 비단을 빌려 당신에게 간다”라는 문장으로 나타난다. 비단잉어에게서 비단을 빌릴 수 없다는 건 다 아는 사실. 그러나 시인은 비단과 잉어를 분리시키면서까지 그 일을 감행한다. 동시적인 상상력이라 할 수 있는 이 문장으로 비애가 더 깊어지면서 독자에게 아픔을 전염시킨다. 왜 하필 비단일까? 비단은 물을 튕겨내는 “물에 젖지 않는 종이”이기 때문이다. 엄마는 지금 비단잉어처럼 자식을 올려다보고 있고, 나는 “죽어서도 뛰게 할 당신의 심장을/고민하고 있”다. “아주 잠깐 동안” “반짝”이는 늙은 비단잉어인 엄마는 현실화될 수 없는 바램을 갖고 있는 아들의 마음을 알고 있다(“비단잉어에게 빌린/비단을 들고 서있는 나를 쳐다보고 있다”). 그것은 모자가 몸으로 주고받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현실적으로 엄마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 죄송과 비애가 “허공에 고양이수염을 붙여주러 온/미친 비행기인양”에 드러나는 내 모습이다. 내 몸의 산도(産道)를 통해 “내가 낳았지만 더 이상은/어쩔 수 없”는 엄마에게 자식은 나직한 소리로 읊조릴 수 있을 뿐이다. “걱정 마, 엄마는/지금 엄마 배 속에/있으니까” 확실히 그는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도 모던함을 거부감 없이 잘 사용할 줄 안다. 깊이, 환상적인 상상력,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 시의 덕목 3요소가 고루 갖춰진 시를 보는 기쁨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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