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남산은 고려와 신라 불교의 세계관이 들어선 불산(佛山)이면서, 남산산성이 세워진 수호공간이자, 매월당 김시습 등 유자(儒子)의 은신처로 활용된 복합적인 장소이다. 지금은 전국의 수많은 등산객이 찾는 명산으로 찾는 이가 많아 한산함을 느낄 수 없다. 몽암(蒙庵) 이채(李埰,1616~1684)는 지역의 선비들과 울산을 자주 오갔으며, 남산의 천룡사(天龍寺)에 들러 「遊天龍寺」․「天龍寺吟呈同遊諸君子」등 한시를 지었고, 오연(烏淵) 최수(崔琇,1657~?) 역시 경주의 금오산을 유람하고 「유금오산록」등 상세한 기행문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은적암은 설잠스님[김시습]이 기거한 공간으로 용장골의 수려한 경치와 연관된다. 그리고 고위산에 위치한 천룡사는 고려를 거쳐 신라 그리고 조선에 이르기까지 남산의 주요한 공간으로 인식되었다. 『삼국유사』제4, 「탑상(塔像)」에 “시주하는 집안의 부모가 천녀(天女)·용녀(龍女) 두 딸을 위해서 절을 세우고 딸들의 이름의 첫 글자를 따서 천룡사라 하였다.”고 전한다. 경주최씨 최은함(崔殷含)의 아들 최승로(崔承魯,927~989)가 최숙(崔肅)을 낳고, 최숙이 시중(侍中) 최제안(崔齊顔,?~1046)을 낳았는데, 1040년에 최제안이 고려의 국태민안을 위해 이 절을 중수하였다”고 전한다. 당시 풍수가는 천룡사와 은적암의 관계를 수평적으로 보았고, 칭추(秤錘:평형저울추)로 표현하였다. 칭추(秤錘)는 중국에서 촉군(蜀郡)의 동산(銅山)이 무너지자 위(魏)의 낙양(洛陽) 궁궐 안에 있는 종이 울었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로, 『주역』「건괘(乾卦)」「문언(文言)」에 “같은 소리는 서로 응하고 같은 기는 서로 구한다(同聲相應同氣相求).”라고 하였는데, 공영달(孔潁達)의 소(疏)에 “누에가 실을 토함에 상(商)음을 내는 현이 끊어지고, 동산이 무너짐에 낙양의 종이 응한다(蠶吐絲而商弦絶 銅山崩而洛鐘應)”라는 구절이 있듯이, 사물의 상호 긴밀함을 표현한다. 즉 천룡사 절이 폐하면서 은적암 암자 역시 허물어졌다는 식의 논리는 맞지 않으며, 실제 암자에 기거한 채원(彩遠)스님이 이를 증명하였다. 화계(花溪) 류의건(柳宜健,1687~1760)은 내남 화곡에 살면서 남산을 두루 답습하였고, 유자의 입장에서 보고 들은 것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가 남긴 기문 가운데 「은적암중창기(隱寂菴重刱記)」 기록은 지역의 소중한 기록물로 남산에 대한 소중한 역사를 보여 준다. 그 번역문을 탑재해 독자의 편의를 돕고, 깊어가는 가을, 시간을 내어 용장골에 올라 맑은 계곡 물소리와 설잠교의 아름다운 풍광을 보고, 매월암과 용장사 그리고 고탑 등을 두루 유람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은적암중창기(隱寂菴重刱記) - 화계 류의건 천룡사(天龍寺)는 신라 시대의 고찰이다. 절의 북쪽으로 고개 넘어 조금 동쪽에 은적암(隱寂菴)이 있는데, 허물어져 터만 남은 지 거의 30년이다. 풍수가(風水家)는 “이곳 은적암은 천룡사의 칭추(秤錘:평형저울추)이고, 절의 경중(輕重)이 이곳과 관계있다.”라고 말하지만, 이 설은 믿기 어렵다. 그러나 동산(銅山)이 기울자, 낙종(洛鍾)이 울리듯 사물이 진실로 서로 감응함이 있거늘 하물며 기맥(氣脈)이 융합하여 유통함에 있어서랴? 승려 채원(彩遠)이 늘 이것을 슬퍼하였다. 하루는 대중에게 고하길 “내가 이 절에 기거한 지 거의 50년인데, 암자가 무너진 이래로부터 절은 나날이 쇠퇴하였고, 당시의 암자 가운데 열에 여덟아홉은 줄었으니, 풍수가의 설은 믿을 것이 못 된다. 또 절이 있은 지가 암자보다 오래되었다. 옛적에는 있다가 지금은 없다면, 어찌 우리 절의 부끄러움이 되지 않겠으며, 함께 중창하지 않겠는가?”라 하였다. 이에 약간의 돈을 내어 그 비용을 도왔다. 풍감(豐鑑) 등 네 비구(比丘)에게 시주받아 인연을 모아 재물을 모으도록 하였고, 연환(演還) 스님이 공사를 맡았다. 금년 3월 3일에 공사를 시작해 4월 17일에 일을 마쳤으니, 일의 빠르기가 어떠한가? 암자가 완성되자 멀리서 나에게 기문을 부탁하였고, 나는 유자(儒子)의 신분이라 암자의 흥폐를 함께 하지 않았지만, 내가 어릴 적 이곳 암자에서 노닌 적이 많아 도움을 받은 사모함이 있었다. 이미 허물어져 다시 중창하였으니, 황홀하게 오래 만나지 못한 암자를 마주하니 가히 한마디의 기쁜 마음이 없으리오? 멀리까지 남들에게 베풀어주기를 좋아하고, 절은 도움을 많이 받았다. 지금 이 암자는 멀고 험함에서 이뤄진 것이 아니라, 또한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그 공을 이뤘다. 암자는 매우 깊숙하고 고요한 곳에 있으니 진실로 세속의 인연을 쉬는 자가 머무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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