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활성에서 나와 국도 4호선인 경감로를 따라 동쪽으로 가면 보문호수에 이르게 된다. 계속 가면 왼쪽으로 경주월드이다. 여기서 보문단지로 진입하기 200여m 전에 천군2길로 접어들어 200여m를 가면 서라벌초등학교 정문에 이르고 학교 담장을 따라 동쪽으로 200m쯤 가면 천군동사지이다. 이 사지는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천군동사지 동편은 경주엑스포 공원이다. 이 일대는 일제강점기에 도립 축산시험장이 있어 산양과 면양을 길렀다고 해서 해방 이후에도 얼마 동안은 양장(羊場)이라 했다. 천군동사지와 보문호수 사이에 있는 놀이공원은 1985년 개장 당시에는 도투락월드라 하였는데 1992년 경주월드로 이름을 바꾸고 종합 휴양 레저시설로 변모하였다. 이 사지 주위의 마을 이름을 천군이라 한 것은 신라 자비왕 때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이 마을의 서쪽 명활성에 천 명의 군사들이 주둔해서 천군(千軍)이라 불리게 되었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보문저수지를 조성하기 이전, 마을 앞의 내[川]가 활[弓]모양과 비슷하다고 해서 천궁(天弓)으로 불리다가 천군이 되었다고도 한다. 보문호수의 서북편에는 북군마을이 있는데 역시 신라 때 명활성을 지키던 군사들이 주둔한 북쪽 마을이라 하여 북군(北軍), 혹은 뒷군이라고도 하였다. 현재 천군동 사지에는 동서 2기의 탑이 우뚝 서서 옛 신라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이 절터와 관련된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아 시찰 이름은 물론 창건과 폐사 시기도 알 수 없다. 『경주풍물지리지』에 의하면 1935년 경 현각사(玄覺寺)라는 명문 기와를 발견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외 어느 자료에도 이런 내용을 확인할 수 없다. 사찰명은 경전과 관련이 있거나 지역명 또는 창건주, 고승 등과의 관련 등을 고려하여 짓는다. 그런데 현재의 절터는 현각사라는 사찰 이름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玄’은 ‘검다’ ‘그윽하다’라는 뜻이고 ‘覺’은 ‘깨닫다’는 의미이니, 깊은 골짜기 그윽한 곳에 있는 참선 수행의 도량이어야 하는데 이 절터는 마을 한가운데 있으니… 1938년 일본인 건축학자 요네다 미요지(米田美代治)가 이 절터를 전면적으로 발굴하였다. 당시 사찰명을 추정할 만한 자료는 발견되지 않았다. 발굴 결과 건물 자리는 쌍탑을 중심으로 중문지, 금당지, 강당지 등이 확인되었으나 회랑이 없는 것이 특이하다. 금당은 앞면과 옆면이 모두 5칸, 강당은 앞면 8칸 옆면 3칸, 중문은 앞면 3칸 옆면 2칸의 건물이었음이 밝혀졌다. 전체 절의 규모는 중문에서 강당까지 남북으로 79m, 동서로는 61m이다. 금당지 부근에서는 통일신라시대의 원형주좌(圓形柱座)가 새겨진 초석이 몇 개 남아 있었다. 이때 발굴된 다량의 기와, 치미 등은 왕궁터에서 발견되는 것과 동일하여 이 사찰의 격이 높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발굴된 치미는 높이가 58m나 되는데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으나 현재 전시는 되고 않고 있다. 박물관에서 치미로 전시되고 있는 월지에서 출토된 것과 황룡사에서 발굴된 것 뿐이다. 서탑 앞에는 초석 등을 모아두고 양 탑의 북쪽으로는 건축물의 부재로 보이는 석재가 놓여있다.一微塵中含十方(일미진중함시방)아주 미세한 티끌 하나에도 온 법계가 다 들어있다.의상조사 법성게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기와 조각, 초석 하나라도 제대로 살핀다면 이 사찰의 제대로 된 모습이 환히 보일 것이다. 그런데 아둔한 이 마음으로는 도무지 감이 잡히질 않는다. 의상조사께서 필자의 머리를 쥐어박으실 것 같다. 머리가 띵해진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