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는 어릴 때 부친의 18번곡인 남인수 선생의 ‘진주라 철리길..’이라 종종 듣고 자라 왔으나, 필자가 2015년 7월 공공기관 취업을 하기 전까지는 거의 찾을 일이 없는 곳이었다. 일반인들에게 진주하면 떠오르는 단어가 있다면, ‘진주난봉가’로 대변되는 양반문화, 그리고 10월의 ‘유등축제’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쉽게 지나칠 수도 있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 있는데, 고등학교 국어책에 나오는 수주 변영로 시인의 ‘논개’시의 주 무대가 진주성이란 것과 그 일원의 남강과 진주정신에 관한 것이다. 통상 매년 10월이면 유등축제로 전국은 물론 외국 관광객들이 진주를 찾곤 했었는데 코로나19의 영향으로 2년 동안 열리지 못하다가 12월 4일부터 4주간 진주남강과 진주성 일원에서 열린다고 한다. 유등축제의 유래는 진주성전투에서 비롯되었다.
임진년(1592년, 선조 25년) 10월(이하 음력)의 전투를 제1차 진주성전투라 하고, 이듬해 계사년(1593년) 6월의 전투를 제2차 진주성전투라 부른다. 제1차진주성전투는 곧 진주대첩으로서 임진왜란 3대첩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데 왜군 3만명을 김시민 목사(牧使)를 중심으로 관군과 의병 3700명이 맞서 싸워 이긴 전투를 말하며 이때 김시민 장군은 병으로 사망하게 된다. 진주성은 당시 정읍, 전주 등 호남평야를 거쳐 한양으로 올라가는 전략적 요충지였기에 8개월 뒤 도요토미히데요시가 총공세를 명령하여 제2차 진주성전투가 벌어진다. 이에 가등청정을 비롯 내로라하는 장수와 왜군 9만 3000명이 성안의 7000명의 관군 및 의병과 싸운 결과 우리 군과 백성들이 엿새 동안 버티다 전원 사망하게 되고 이때 왜군은 성안의 가축까지도 도살했다 전해진다. 이때 시체 썩는 냄새가 진주는 물론 남강을 따라 낙동강에 이를 정도로 처절했다고 한다. 유등이 임란당시 남강 위의 통신 수단으로 쓰였다고 전해지며, 이를 기념하여 진주시가 2000년부터 1950년대 말부터 진행해왔던 개천예술제와 동시에 전국적인 축제로 승화시켜 진행했다.
2018년 유등축제 때 필자는 진주예총의 일원으로 이 축제에 참여하게 되었다. 당시 임무는 예총의 팀장으로서 특전사 예비역들과 함께 풍물시장 치안유지, 고속고무보트를 이용한 남강 정화작업, 그리고 시가행진 등 한 달 동안 하루 15시간 이상의 강행군을 하게 되었다. 당시 가장 기억에 남는 일들 중 두 가지를 든다면 우선 태풍 콩레이 당시 구조작업을 들 수 있다.
태풍이 북상한다는 소식과 함께 지리산에 밤사이 700미리 이상의 비가 내릴 것이라는 일기예보가 있었고, 하천이 물에 잠길 수 있으니 상인들은 대피하라는 안내방송을 했었다. 하지만, 풍물시장 천막을 수백만 원을 주고 대여해서 어렵사리 장사하던 청각장애인들이 이 말을 듣지 못해 가져온 물품이랑 도구들을 잃어버릴 상황이었다. 우리 팀원들은 밤잠을 설쳐가며 밧줄로 천막동과 이동식 화장실 등을 결박하면서 물에 잠기는 상황에 대처할 수 있었다.
또 한 가지 필자가 시가행진에 진주시민을 대표해 김시민 장군으로 뽑혀 가마에 올라타고 진주시내를 눈으로 ‘시찰’하는 가문의 영광을 누린 것이었다. 가마를 끄는 마부청년이 찍어준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렸더니, 친한 동기생이 “군에서 진급 못하더니, 진주 가서 비로소 장군 진급을 했다”라고 말해 한바탕 크게 웃을 수 있었다. 독자분들 중 혹 기회가 되신다면 2021년 유등축제에 찾아와 보실 것을 권하고 싶다. 남강 위의 배다리를 건너 진주성내 설치된 유등을 둘러보고 촉석루에 올라 펼쳐진 유등의 물결을 바라보며 한 해를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올 유등축제의 백미는 새해맞이 타종과 함께 유등축제 폐막식이 볼 만할 것이라며 벌써 부터 기대감을 갖게 한다.
또한, 진주성 촉석루 한 쪽에 마련된 ‘의기사’와 누각 밑에 놓인 ‘의암’을 꼭 둘러보실 것을 권하고 싶다.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성내 모든 사람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촉석루에서 의기양양하게 잔치를 벌이는 상황에서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으로 뛰어든 의로운 행동을 전후 백 년 동안 진주의 유생들이 상소를 올려 조정의 승인 하에 지은 값진 사당이다. 그리고 혹 낮에 오시는 분들은 촉석문 정문 한쪽에 서 있는 수주 변영로 선생의 시 ‘논개’를 읽어보고 강낭콩보다 더 푸른 남강과 진주교 밑 왜장을 끌어안을 때 사용했다던 논개의 가락지를 상징한 ‘숨은 그림’ 찾기를 해보시길 권하고 싶다.
나라가 어려울 때 당시 임금과 조정의 고관대작들은 의주로 도망하기 바빴다. 하지만 분연히 일어난 의병들과 수적인 열세에도 끝까지 싸운 진주성의 백성들은 도망하지 않고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다.
수적 열세에도 기죽지 않고 싸운 김시민 장군의 결단과 용기 그리고 ‘아! 강낭콩보다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로 시작되는 변영로 선생의 논개 시에서 알 수 있듯이 ‘진주정신’은 변함없이 우리들 가슴속에 남아 늦가을 남강의 푸르름을 더해 주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