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주오씨 천파(天坡) 오숙(吳䎘,1592~1634)은 증조부 경상좌수군우후 오수억(吳壽億), 조부 경상우병마절도사 오정방(吳定邦)이고, 부친 종친부(宗親府) 전부(典簿)를 지낸 오사겸(吳士謙), 모친은 한성부서윤 이시중(李時中)의 따님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역사서를 배웠고, 문장이 뛰어나 신동이라 소문이 자자하였으며, 16세에 오봉(五峯) 이호민(李好閔,1553~1634)의 칭찬을 받았다. 19세에 진사에 합격하였고, 21세에 증광문과에 합격해 승문원 권지정자(權知正字)가 되었다. 30세에 종사관으로서 관서와 해서를 순시하였고, 40세 되던 1631년 9월에 경상도 관찰사 신분으로 공무를 겸하여 경주의 옥산서원, 안동의 도산서원 등을 찾았다. 아쉽게도 43세에 풍병에 걸려 젊은 나이에 타계하였지만, 여러 요직을 지냈고, 수많은 시문을 남겼다. 그가 남긴 문장은 간결하면서 명료하고, 550여 수의 한시가 전한다. 특히 유람하며 지은 기유시(紀遊詩)에 뛰어났으며, 저서로는 『천파집』이 있다. 명곡(明谷) 최석정(崔錫鼎,1646~1715)이 신도비명을 지어 오숙의 인물됨을 알렸고, 문집 서문은 백헌(白軒) 이경석(李景奭,1595~1671)이 지었다. 그리고 최석정은 최명길의 손자로 모두 인조반정 이후 이괄(李适)의 난과 연관된 인물들이다. 오숙은 옥산서원을 찾아 주변의 빼어난 경치를 즐겼고, 회재의 후손을 만나 인조의 서찰을 보며 감회를 떠올렸다. 또 도산의 구천(龜川)에 이르러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1467~1555)의 자취를 찾아 기문을 남겼는데, 회재 이언적의 증조모와 농암의 조모가 자매지간으로 서로 인척이 되며, 농암과 퇴계 역시 인척간이었으니, 오숙의 「유옥산서원기(遊玉山書院記)」와 「유도산기(游陶山記)」 등의 글을 통해 도통연원의 의미를 유추할 수 있다. 그가 남긴 「유옥산서원기」는 서원의 규모와 주변 풍광 그리고 독락당을 지키는 후손과 회재선생의 경계의 말씀을 중점으로 드러내었다. 유옥산서원기(遊玉山書院記) - 오숙 안강현에서 10리를 가면 옥산서원에 도착한다. 옥산은 회재 이언적 선생이 장수(藏修)하신 공간으로, 후학이 공경하고 사모하여 융경(隆慶) 5년(1571)에 서원을 세웠고, 만력(萬曆) 원년(1573)에 위패를 봉안하였으며, 갑술년(1574) 정월 14일에 사액(賜額) 받았다. 비로소 마을 어귀로 들어가니 경계가 남달랐다. 길가의 장송(長松)은 드러누운 듯 뒤덮었고, 샘이 흘러 물이 고인 곳을 하용추(下龍湫)라 하였는데, 양쪽 언덕 모두 푸른 바위의 경치였다. 용추에서 계곡을 따라 수십 걸음을 가서 서원에 도착하였다. 출입문 역락문(亦樂門)에 이르자 … 무변루(無邊樓)를 지나 구인당(求仁堂)에 올랐다. 당(堂)의 좌측을 양진재(兩進齋), 우측을 해립재(偕立齋)라 하고, 뜰의 동재를 민구재(敏求齋), 서재를 암수재(闇修齋)라 하였다. 잠시 쉬면서 옷을 갈아입었다. 손을 씻고 사우(祠宇)에 나아가 분향하고 재배하였다. 원유 네 사람이 따로 서서 예를 도와 마치고, 양진재로 돌아왔다. 원장 이의잠(李宜潛)이 들어가 배알하였고, 물러나서 봉인을 떼어 부첩(簿牃)에 정리하였다. 용추에서 북쪽으로 수십 걸음을 가니 독락당이었다. 선생께서 평소에 거처하던 곳으로 서증손(庶曾孫) 이홍후(李弘煦)․이홍기(李弘炁) 등이 그곳을 지켰다. 독락당의 북쪽에 계정(溪亭)이 있고, 독락당과 정자에 어득강(魚得江)의 제영시가 있고, 근대의 서애 류성룡과 여헌 장현광 등 시작(詩作)의 구절구절 어휘를 다 기록하지 못한다. 이홍후 등이 상자 하나를 내어와 열어 보였는데, 인조(仁祖)께서 동궁(東宮)에 계실 때 선생에게 준 서찰로, 어묵(御墨)이 완연하게 어제와 같았다. 또 선생께서 강계(江界)에서 유배할 때 집안 동생과 주고받은 편지를 읽는데, 한 글자마다 한 방울의 눈물이 흘렀다. 편지글 모두 모친 봉양의 방도와 동생과 조카의 권학(勸學)의 마음이 담겼고, 하나라도 유배의 고단함을 말하지 않았다. 정혜사 법당의 북쪽 창에는 선생이 손수 쓴 글씨가 있는데 ‘말은 공경함이 있고, 행동에는 법도가 있어야 한다. 새벽에 얻음이 있다면, 낮에는 실천해야 한다. 잠시라도 수양하고, 쉴 때는 마음을 안존(安存)함이 있어야 한다. 생각에 사특함이 없어서 바름으로 마음을 수양하고, 곧음으로 기운을 길러야 한다. 신사년(1521) 중추(仲秋)에 이(李) 복고(復古)’등으로, 복고는 선생의 자(字)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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