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로 유명 연극감독으로 활동하다 지난해 영화감독에도 도전하며 영역을 확장해가는 손기호 감독, 그는 인생작 영화 한편을 고르라고 하는 것을 지나치게 가혹하다는 입장이다. 스스로 영화광이라고 칭할 만큼 최소한 이틀에 한 편 꼴로는 영화를 본다는 손기호 감독은 자신의 인생에서 중요한 변곡점 마다 기억나는 영화가 한 편씩 있다고 소개한다.
첫 번째 영화는 경주 명보극장 동시상연관에서 보게 된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1989)’ 이 영화는 미술대학교 교수이던 배용균 교수가 영화감독으로 데뷔하면서 만든 영화로 저예산에 무명배우들을 기용해 찍은 반면 미술교수 출신답게 아름다운 영상미와 철학적인 논제를 제시하며 당시로는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당시 두 편씩 이어서 상영하는 영화관 특성상 손기호 감독은 두 번 더 이 영화를 보기 위해 엉뚱한 영화를 두 번이나 더 보느라 긴 시간을 영화관에서 보냈고 이 영화를 계기로 연극계로 발 디디게 되었다고 회고한다.
두 번째 영화는 비디오 테이프로 본 트란 안 홍 감독의 ‘그린 파파야 향기(1993)’다. 사이공을 무대로 펼쳐지는 베트남 영화로 역시 매우 큰 파장을 일으킨 영화다. 소녀 때부터 하녀생활을 하던 ‘무이’가 신분을 뛰어넘는 사랑을 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정황들이 잔잔하게 그려진다. 이 영화는 음악과 음식, 복장이 영화의 미묘한 은유를 상징하며 극 전체에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손기호 감독은 이 영화가 너무 감동적이었던 나머지 청계천 비디오 상가로 가 영화 비디오 테이프를 구입했을 정도라고 회고한다. 손기호 감독은 그린파파야 향기가 여백의 미가 적절하게 녹아 있는 영화라고 극찬하며 이 작품이 나중에 자신의 연극 ‘복사꽃 피면 송화 날리고’가 여백을 두도록 하는 계기였다고.
세 번째 영화는 봉준호 감독, 송강호·김상경 주연의 살인의 추억(2003). 화성에서 일어난 부녀자 연쇄살인 사건을 모티브로 만든 이 영화는 손기호 감독이 스텝으로 참여한 연극 ‘날보러 와요’가 원작이었고 첫 번째 영화의 실패로 의기소침했던 봉준호 감독이 이 연극에 매료되어 영화로 만들어 스타덤에 올랐던 작품이라 더욱 애착이 간다. 손기호 감독은 연극에서 표현하지 못한 다양한 은유를 영화가 세심하게 표현해 놓았다고 평가한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마더 역시 아주 인상적으로 본 영화로 꼽는다.
네 번째 영화는 이란 영화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2011)’. 이란의 저명한 감독 아쉬가르 파라디의 작품으로 치매 아버지를 두고 이민을 가려는 아내와 버티는 주인공, 임신 사실을 숨긴 채 아버지를 간병하는 가정부 사이에 벌어지는 사건과 갈등을 다룬 영화다. 서로 분명한 가치관을 가진 등장인물들이 양심과 종교를 오가며 벌이는 상황들을 통해 무슬림 사회의 가족관과 삶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손기호 감독은 이 영화가 인간의 심리를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있으며 끊임없는 소재로 이야기를 연결하여 잠시도 긴장감을 늦출 수 없도록 꾸며 놓았다고 감탄한다. 이 영화를 인상 깊게 본 후 역시 아쉬가르 파라디 감독의 영화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2013)’,‘세일즈맨(2017)’을 찾아보게 되었고 역시 비슷한 만족감을 느꼈다고 소개한다.
다섯 번째 영화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2004)’로 일본영화역사의 명장반열에 오른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어느 가족(2018)’. 이 영화는 2018년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화제작으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특유의 섬세하고 담담한 감정선으로 가족을 묘사하는 모습이 탁월하고 그에 걸맞는 영상미가 압권인 영화다. 특히 손기호 감독은 이 영화를 보면 무언가 큰 사건을 만들어 긴장하게 하거나 몰입하게 하지 않고 일상적인 일들을 통해 차분하게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힘이 놀랍다고 극찬했다.
이렇게 여러 편의 영화를 소개한 손기호 감독은 그러나 이중에서도 딱 한 편을 꼽는다면 이란 영화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를 추천했다. 대학로에서 끊임 없이 화제작을 만들어내는 연극감독이 특별하게 소개하는 영화인 만큼 독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관람해 보기를 권한다. 마침 씨민과 나데르는 유뷰브에 무료로 공개되어 있어 스마트 폰으로 보거나 디지털 TV와 연동해서 관람하기에 딱 좋은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