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굴암 대불 정민호동해의 여명을 이마에 적시고흥건한 바다 굽어보며 살아온 눈빛숨을 쉬면 조용히 흔들리는 어깨 너머억겁 세월이 모여 인왕仁王이 둘러 서 있다.소리는 소리에 이어 소리가 되고바람은 바람에 섞여 바람이 된다.솔은 천년을 살아 푸르러고말씀은 침묵 속에 흘러도 깨달을 수 있어라.다문 입술은 영원히 다물어도 말이 되어 나오고눈은 감아도 밝기는 촛불 같다.귀는 속세를 듣지 않아도 다 알고 있듯이코는 몇 천 년을 호흡해도 오히려 따스한 숨결이다.그대 맑은 하늘에 별빛 되어 떨어지면어둠 속에서 빛이 되어 먼 바다를 비추는즈믄* 江에 즈믄 별 모두 떠다니는 것을우리는 다 알고 있다, 다 느끼고 있다. *즈믄: 천(千)의 옛말
석굴암 본존불존상 명호는 학자들 사이 의견이 분분하다. 황수영박사는 아미타여래로 존칭했다. 문명대 강우방 박사는 석가여래로 명했다. 대좌를 합쳐 총 높이 5m 항마촉지인 수인을 취하고 있다. 동해바다를 향해 장엄한 석불로 앉아있다. 1971년 보호설치 유리벽으로 마주 뵈는 본존불 입매에 은근슬쩍 채색의 화색이 돈다. 차오른 숨을 기척 없이 갈앉힌 천년이 고요하고 안온하게 호흡을 가다듬게 한다. 대우주의 기운을 머금고 토하는 석불의 장엄하고 온유한 숨결이 더운피로 닿는다. 부처의 양 눈썹 사이에 난 희고 부드러운 털 백호(白毫)를 상징하기 위해, 불상의 이마에 광명을 비추는 수정 같은 보석을 끼우기나 채색하여 그리기도 한다. 석굴암 본존불 백호는 1966년 8월 직경 4cm·두께0.7cm․국산수정을 순금으로 받쳐 시공했다. 둥근 천장 궁륭(穹窿, Dome), 돔형 반구형 석실공간이다. 천장돌이 빠지지 않게 설치한 장대석(멩에돌)이 한단에 9개씩 3단에 걸쳐 박혀있다. 천장 중앙 꼭대기 연꽃이 새겨져 있다. 이 연꽃에는 세 줄의 균열이 나 있다. 석굴암 내부 화강암으로 잘 짜여 진 돔 천개석에는 설화가 전해진다.【삼국유사】제5권 제9 효선편 돌부처를 조각하려고 큰 돌 하나를 다듬어서 감개(龕蓋)를 만드는데 돌이 갑자기 셋으로 갈라졌다. 대성이 분통스럽게 여기다가 잠깐 잠이 들었다. 밤중에 천신(天神)이 내려와 다 완성해 놓고 돌아갔다. 대성이 잠자리에서 일어나 남쪽 고개로 달려가 향목(香木)을 태워서 천신에게 공양했다. 그래서 그 고개를 향고개라고 불렀다. 불국사의 구름다리와 석탑은 물론이고 돌과 나무에 새긴 솜씨까지 경주의 다른 여러 절들의 그것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훌륭하다.『불국사고금창기』 1703년(숙종 29) 종열(從悅) 스님이 석굴암을 중수하고 굴 앞에 돌계단을 쌓았고다. 1758년(영조 34) 태겸(太歉) 스님이 중수했다. 1891년 울산병사 조순상(趙巡相)이 석굴암을 크게 수리 하였다. 위의 기록들로 19세기 후반까지 석굴암이 잘 보존 되어 있었음을 알려준다. 석굴암은 1907년 일제강점기 일인우체부에 의해 새로 발견된 것인 양 과장 선전되었다. 유명세를 타면서 1909년 조선통감부의 부통감 소네 아라스케가 석굴암을 순시했다. 그의 방문 직후 석굴암에 봉안되어 있던 총40구의 조각상 중에서 감실 앞쪽 좌우 조각상 2구가 실종된다. 1910년 8월 석굴암 전체를 해제하여 경성(京城)으로 반출하라는 지침이 내려졌지만 여러 요건으로 성사되지 않았다. 1913년 10월부터 1915년 8월 사이에 해체복원공사를 실시했다. 1917년 2차 보수공사가 실시되었다. 1920년부터 1923년 누수현상을 해결하기 위한 3차 보수공사가 행해졌다. 1927년 누수로 인해 생긴 이끼와 오염물을 제거하기 위해 증기보일러를 설치했다.
공무원 월급이 20원, 서울 주택가격이 300원 할 그 당시 석굴암 수리비는 2만3000원 파격적 예산이 투입되었다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