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성은 축성 위치에 따라 테뫼식과 포곡식으로 구분된다. 테뫼식은 정상부가 평활한 산정부를 선택하여 정상부를 돌아가면서 성벽을 쌓는 방식이다. 포곡식은 성벽이 돌아가는 범위 내에 계곡이 포함되도록 함으로써 성내의 가용면적을 넓히고 성내에 수원(水源)이 포함되도록 함으로써 주민들이 평상시 거주하거나 지구전이 가능하도록 한 산성이다. 명활성은 산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명활산성이라고 해야 하겠으나 『삼국사기』 등 사서에는 명활성으로 기록되어 있다. 명활성은 정상인 흰등산(해발고도 252m)과 그 서쪽에 있는 장군봉을 둘러싸고 삼국시대 쌓은 포곡식 산성으로 길이는 약 4.7Km이다. 이 산성의 남쪽 일부 구간의 토성을 제외한 석성만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삼국사기』「신라본기」에 의하면 신라에 왜가 침입했다는 기록이 28회에 이른다. 명활성은 왜인의 침략이 극심하였던 시기에 이들의 침범에 대비하기 위하여 쌓았다. 신라 실성왕 4년(405)에 왜병이 명활성을 공격하였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미루어 보면 축성 시기는 그 전일 것이다. 특히 431년(눌지왕 15)에는 왜인이 이 성을 에워쌌으나 소득없이 물러갔다고 하였다. 자비왕 16년(473) 7월에 이 성을 개수하고 475년 정월에 왕이 이곳으로 옮겨 거주하다가 소지왕 10년(488) 다시 월성으로 이거하였으니 13년간 명활성은 궁성이었다. 진흥왕 15년(554)에 성을 수축하였는데 둘레가 1906보였으며, 진평왕 15년(593)에 개축하여 그 둘레가 3000보라 하였다. 명활성의 중요성은 또 다른 역사 기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삼국사기』 「잡지」 ‘직관’에 의하면 신덕왕 2년에 명활전(明活典)을 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명활성을 관장하는 관청으로 추정된다. 관청을 두어 관리할 만큼 명활성이 중요했음을 알려주는 단서다. 명활성을 다시 한번 더 둘러볼 작정을 하고 집을 나섰다. 북천변 남로를 따라 가다 숲머리 마을을 지나면 갈림길이다. 왼쪽 다리를 건너면 보문단지이고 감포 방향인 오른쪽으로 가면 길 우측에 명활성이 시야에 들어온다. 수년 전 이곳에 수질이 우수한 샘이 있어 2-3일에 한 번씩 들리곤 했었다. 당시 쌓은 성은 대부분이 허물어져서 겨우 몇 군데에서 자연석을 깨뜨려 아무런 가공 없이 쌓았던 옛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진평왕 때 개축한 것으로 추측된다. 축성방식은 다듬지 않은 돌을 사용하는 신라 초기의 방식을 취하고 있다. 지난 1988년 8월 이곳 성벽 부근의 포도밭에서 명활성작성비가 발견되었다. 비문은 9줄에 148자로 앞면에 거의 빈틈없이 새겼다. 비문은 작성 간지(干支)가 있는 앞부분과 축성공사 책임자와 실무자의 이름, 공사 담당 거리와 위치, 작성에 참여한 사람 수, 공사 기간, 글쓴이 순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기록에 의하면 진흥왕 12년(534) 35일에 걸쳐 명활성을 축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비문 ‘此記者古他門中西南回行其作石立記’ 중의 고타문(古他門)은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북문지로 추정된다. 1988년 태풍으로 성벽이 붕괴되어 1989년 8월부터 3개월간 발굴조사를 통하여 성벽의 규모와 축성기법, 수구 등의 시설을 확인하였다. 2012년 3월에 시굴조사를 실시하고 2013년과 2014년 두 차례에 걸쳐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문지 등을 확인하였다. 문지의 동쪽 40m 지점 석벽이 꺾이는 부분에 둥근 형태의 치(雉) 즉 반월형의 곡치(曲雉)가 있다. 또 성벽의 아래를 보강하기 위하여 바깥쪽에 보축을 쌓았다. 문지를 지나 좌측으로 성을 둘러볼 수 있는 길이 나 있다. 곡치를 지나 가다보면 무너진 돌더미가 죽 이어져 있다. 이 위로 올라가면 보문호 정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20여 분 쯤 더 안으로 들어가면 정토암이라는 작은 암자가 있다. 이 암자를 지나서는 더 이상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없다. 이 암자 아래로 내려가면 보문호반에 이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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