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                                            엄원태 가설식당 그늘 늙은 개가 하는 일은온종일 무명 여가수의 흘러간 유행가를 듣는 일턱까지 땅바닥에 대고 엎드려 가만히 듣거나심심한 듯 벌렁 드러누워 멀뚱멀뚱 듣는다곡조의 애잔함 부스스 빠진 털에 다 배었다희끗한 촉모 몇 올까지 마냥 젖었다진작 목줄에서 놓여났지만, 어슬렁거릴 힘마저 없다눈곱 낀 눈자위 그렁그렁, 가을 저수지 같다노래를 틀어대는 주인 아저씨보다곡조의 처연함 몸으로 다 받아들인 개가여가수의 노래를 더 사랑할 수밖에 없겠다뼛속까지 사무친다는 게 저런 것이다저 개는 다음 어느 생에선가 필시 가수로 거듭날 게다노래가 한 생애를 수술 바늘처럼 꿰뚫었다 -노래의 진정한 주인 가설식당, 흘러간 노래, 그늘의 늙은 개는 그 말 자체로 삶이란 허무한 것이며 욕망이란 덧없다는 걸 나타내주는 표지이다. 이 세 가지가 나란히 놓인 풍경 속에서 시인은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개에게 한없는 연민과 애정을 보인다. 그 애정이 눅진하도록 넘치는 애잔함이 이 시에는 있다. 임시로 지은 식당에서는 하루 종일 흘러간 노래가 울려퍼진다. 그 노래를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니 부스스 털이 빠진 개만 그걸 듣는다. 그는 “진작 목줄에서 놓여났지만, 어슬렁거릴 힘마저 없”는, 죽음에 가까워진 영혼, 늙은 개가 뼛속까지 사무치도록, 노래가 수술바늘처럼 꿰뚫을 정도로 듣는다. 유일한 청중, 그 개 덕분에 틀어놓은 노래는 허공으로 휘발되지 않고 개의 몸에 다 빨려든다. 그 때 개는 그 자체로 무수한 청중이 되고, 전 우주가 되기도 한다. “눈곱 낀 눈자위 그렁그렁, 가을 저수지 같다”는 문장을 보라. 그것은 늙은 개가 처연한 노래의 정서와 하나가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원래 노래는 들으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루 종일 생각 없이 틀어대는 주인에게 기껏 노래는 타성이거나 건성일 수밖에 없다. 그는 호객이나 영업에 관심을 보이는 속물일 뿐, 노래 따위는 수도꼭지에서 흘러나와 계속해서 넘치는 물처럼 무작정 흘러가도록 놔두는 것이다. 그러니 “턱까지 땅바닥에 대고” 듣거나, “벌렁 드러누워” 곡조를 다 빨아들이는 개가 노래의 진정한 주인이 아니겠는가. 마치 가난한 새들이 하늘의 주인이듯. 가난한 물고기들이 강과 바다의 주인이듯 말이다. 더욱이 생의 마지막 순간을 온 몸에 오직 노래만 채우고 있으니 그는 “다음 어느 생에선가 필시 가수로 거듭날” 것이다. 자신을 온전히 비운 곳에 노래가 들어오고 그 노래로 인해서 개는 가수로 재구성된다. 몸속에 쌓인 그 노래는 언젠가는 부활한다는 말이다. 엄원태의 이 시를 섣불리 치유와 위로의 언어라고만 말해서는 안 된다. 애잔한 존재의 영혼을 따듯하게 보듬어줌으로써 개가 다시 태어나고, 나아가 이전에 보지 못 했던 새로운 시도 태어났다고 헤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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